배임·탈세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야기다. 이 회장은 지난 10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이미 충분한 법리 공방이 이뤄진데다 건강상태가 위중해 집행유예로 풀려날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 하지만 경영복귀가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CNB=도기천 기자)
이재현 “살고 싶다, 살아서 ‘그레이트 CJ’를…”
2년 넘게 투병…근육 굳는 유전병에 간 손상
유산소송·탄원·화해…삼성가(家) 질곡의 세월
이 회장은 최근 부친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을 떠나보냈지만, 건강이 악화돼 끝내 빈소를 지키지 못했다.
그는 2013년 7월 1일 구속 수감된 이후 지금까지 대부분 시간을 구치소가 아닌 병원에서 보내고 있다. 구속 직후 요독증이 심해져 부인 김희재씨의 신장을 이식받는 수술을 받았다. 이후 2년 넘게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채 재판을 받고 있다. 역대 ‘최장기 구속집행정지’ 기록이다.
신장을 이식 받았음에도 여전히 거부 반응과 감염 등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CJ 측에 따르면 면역억제 요법의 부작용 때문에 면역력이 크게 떨어져 홍역 등 각종 바이러스에 반복적으로 감염되고 간 수치가 정상 수준의 5배를 넘나들 정도로 ‘간독성’ 증상이 심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면역억제제를 줄이면 거부 반응과 신장세뇨관 손상, 단백뇨 증가 등으로 신장이 제기능을 못하게 된다.
앞서 이 회장은 1994년 처음 고혈압을 확인, 97년에는 뇌경색이 발생해 뇌졸중 판정을 받은 후 약물치료를 받아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과 발의 근육이 위축되는 희귀유전병 ‘샤르코-마리-투스’(CMT)의 증세가 악화돼 걸을 때 특수신발 등 보조기구를 이용해야 했다.
삼성가의 유전병으로도 알려진 ‘샤르코-마리-투스’는 10만 명당 36명에게 발병하는 희귀질환으로 손발의 근육이 점차 약해지는 무서운 병이다.
이 병 때문에 더욱 치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장기이식에 따른 면역억제제 사용이 CMT 증상을 악화시키고 CMT에 따른 근육·신경 손실이 다시 이식된 신장의 안정을 방해하고 있는 것. CJ 측은 “체중이 여전히 50㎏ 초반에 불과하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라고 전했다.
이 회장이 병원과 법정을 오가는 동안 삼성가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 회장의 부친인 이맹희 명예회장과 숙부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유산상속을 두고 송사를 벌였다. 두 사람은 용인 선영에서 지내온 선대 회장의 제사를 따로 모실 정도로 대립했다.
이 명예회장은 생전에 자신의 재판이 아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며 자책하다 병세를 키운 것으로 전해진다. 소송 당시 변호인에게 “선대 회장 뜻을 바로잡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때문에 아들이 고초를 겪는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는 심정을 털어 놓기도 했다.
지난해 2월 소를 취하하면서 “죽기 전 5분 만이라도 건희를 만나고 싶다”고 했지만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지난달 세상을 떠났다.
CJ그룹장으로 치르진 장례에는 부인 손복남 여사를 비롯, 장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이 명예회장의 누나인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 홍라희 리움미술관 관장(이건희 회장의 부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 정용진 부회장, 정유경 신세계그룹 부사장 등 범(汎)삼성가 친인척 대부분이 참석해 이 명예회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하지만 정작 상주인 이재현 회장은 빈소를 지키지 못했다.
지난해 8월에는 이 회장의 건강을 지켜볼 수만 없었던 삼성가 여인들이 재판부에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올린 일도 있었다.
범삼성가 여인들 중 가장 웃어른 격인 손복남 여사가 병세가 극도로 악화된 아들 이재현 회장을 위해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자 이 회장의 숙모인 홍라희 관장이 이를 받아 들였고, 이에 다른 숙모들과 고모가 함께했다.
탄원서에는 이 회장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 외에도 CJ그룹의 경영공백, 가족 간 화해 등의 내용이 담겼다. 이를 계기로 삼성(이건희)과 CJ(이맹희) 간 극적인 해빙 무드가 조성됐다.
한편 부친과 대립했던 이건희 회장은 지난해 5월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뒤 약 1년 4개월째 병상에 누워있다. 그 사이 삼성그룹은 몸집을 줄이고 이재용 부회장 중심 체제로 재편됐다.
이 회장은 지난 2010년 “2020년까지 그룹 매출 100조 원, 영업이익 10조 원, 글로벌 매출 비중 70%를 넘어서는 ‘그레이트 CJ’를 완성하겠다”고 공언했었다.
하지만 지난해 2조 4000억 원 투자 계획 가운데 실제 집행 금액은 79%(1조 9000억 원)에 불과했다. 동부산테마파크 등 수년 동안 추진해온 대형 개발 프로젝트와 인수·합병(M&A)이 중단되거나 무산됐다.
그나마 최근 CJ대한통운이 4500억 원으로 중국 냉동물류회사 룽칭(榮慶·ROKIN)물류를 인수하는 M&A에 성공한 것은 주목할 성과로 꼽힌다.
이 회장은 지난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 등이 설립한 미국의 영화제작·배급사 드림웍스에 3500억 원을 투자하면서 ‘문화 CJ’를 세계에 선포한 바 있다. 당시 주변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미래 먹거리’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투자를 강행했다.
이후 한류 열풍을 주도했고, 중국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엔터테인먼트·서비스·유통·식음료 분야에서 후발 기업들의 길을 터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회장이 다시 복귀하더라도 예전처럼 원대한 비전을 펼 수 있을지는 안개속이다. 건강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집행유예로 자유의 몸이 된다 해도 경영 일선 복귀는 힘들지 않겠냐는 게 재계의 중론이다.
CJ 측은 “재판에 따른 심리적 압박 등이 병세를 더 악화시키는 만큼 판결이 좋은 방향으로 나오면 병세에 차도가 있지 않겠냐”며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밖에서는 “CJ그룹 경영뿐 아니라 이 회장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빨리 '실질적 후임자'를 뽑는 게 낫다”는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레이트 CJ’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작년 8월 항소심 최후진술이다. “살고 싶습니다. 살아서 제가 시작한 문화 사업을 포함해 CJ의 미완성 사업들을 완성해 반드시 세계적인 글로벌 생활 문화 기업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이것이 선대 회장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고, 길지 않은 저의 여생을 국가와 사회에 헌신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