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유통산업발전법 상 상생협약은 준공 후 사업허가 단계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쇼핑몰이 첫 삽도 뜨지 않은 상황에서 시가 민생조정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이번 사례가 추후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해 문제 해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주목된다. (CNB=도기천 기자)
서울시, 쇼핑몰 첫 삽 뜨기 전 중재 ‘이례적’
상인회, 무조건 반대→조건부 반대 변화 기류
롯데, 대형마트 입점 포기…문화시설 늘리기로
서울시는 지난달 20일 경제진흥본부 소상공인지원과 산하에 ‘마포구 지역상생발전을 위한 TF팀’을 발족했다. 경제진흥본부장이 TF 팀장을 맡고 관련부서 공무원과 전문가, 학계 관계자로 구성됐다.
이는 롯데쇼핑몰이 지역상권에 끼칠 영향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대형쇼핑몰 입점에 따른 재래상권 피해를 최소하겠다는 게 TF팀의 운영 취지다. 이 과정에서 롯데와 상인단체 양측의 의견을 수렴, 조정해 향후 상생협약의 큰 틀을 마련하겠다는 것.
서울시 TF 관계자는 19일 CNB에 “상생협약까지는 상당 시일이 걸리겠지만 건축허가 전 단계에서 미리 서로의 의견을 조정해 방향을 잡자는 의미에서 꾸려졌다”고 전했다.
현재 롯데쇼핑몰 건립 내용을 담은 지구단위계획안은 주민공람을 마치고 마포구 도시계획위원회를 통과해 최종 심의단계인 서울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로 넘어간 상태다.
위원회를 통과하면 관할 자치구인 마포구의 건축허가를 거쳐 내년 상반기 중에 착공될 예정이다. 늦어도 2018년 상반기에는 문을 열겠다는 게 롯데 측의 계획이다.
시는 도시건축위의 최종심의를 사실상 TF팀에 맡긴 상태다. TF팀은 상권영향평가, 롯데와 지역상인 간의 각종 갈등을 중재하고 합의를 도출해 내는 역할을 해나갈 예정이다.
오경환 서울시의원(마포4·새정치민주연합)은 CNB에 “건축허가가 난 뒤 골목상권 침해 문제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가 별로 아쉬울 게 없어 협상에 적극적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번에는 아예 심의과정에서 양자 간 합의를 도출하겠다는 것이라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된다”며 “상인들과 롯데 간의 입장차가 커 난항이 예상되지만 어떻게든 지역상권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합의를 이끌겠다”고 밝혔다.
현행 유통산업발전법에서는 대기업 유통업체가 들어서려면 해당 지역(반경 1km 이내) 상인회와 상생협약(지역협력계획서)을 맺도록 하고 있지만 이는 건축허가와는 무관하다. 착공 후 준공(사업허가) 단계에서 관할 지자체에 협약서를 제출하면 된다. 따라서 건축허가 전부터 상생 조율이 진행되는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오 의원은 “TF팀을 상생협약 때까지 유지할 수 있도록 서울시에 계속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시작부터 끝까지 롯데와 주민 간의 갈등을 중재·조정하겠다는 의미다.
롯데家 집안분쟁에 찬성 서명운동 ‘없던 일’
TF팀과 롯데, 비대위는 20일 처음으로 3자 회동을 가졌다. 지역 상인단체들로 구성된 ‘상암동 롯데쇼핑몰 반대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와 롯데백화점(상암프로젝트팀) 측이 처음으로 마주 봤다.
롯데 측은 이 자리에서 대부분 주민들이 지역활성화 차원에서 쇼핑몰 입점을 바라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암동이 최근 몇 년 새 미디어·IT의 메카로 부상했고, 1만여 세대의 아파트·오피스텔이 들어섰지만 쇼핑공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논리다. 또 타 지역 쇼핑몰에 비해 복합문화시설 비중을 더 늘리는 쪽으로 설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면 비대위 측은 판매시설의 최소화 및 쇼핑몰 일부 지하면적(지상 도로의 지하부분)에 대한 서울시의 특혜 의혹 등을 제기했다.
주민들 간에도 이해관계가 엇갈리고 있다.
상암동아파트단지연합회 김병식 회장은 19일 CNB와 만나 “쇼핑몰이 하루속히 들어와야 한다는 게 주민들의 대체적인 여론”이라며 “롯데 측에게 문화센터 등 상암동 주민을 위한 시설을 확충해줄 것을 요구했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 회장을 비롯한 상암동 월드컵파크 1~12단지 회장단은 지난 5~6월 두 차례 롯데와 면담한 뒤 서울시에 쇼핑몰의 조속한 착공을 바란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후 대대적인 주민서명에 들어가려 했으나 롯데가(家) 집안 분쟁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계획을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은 최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형인 신동주 전 일본롯데 부회장 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순환출자 등 전근대적인 지배구조가 드러나며 재벌개혁의 타깃이 돼, 일부 시민단체는 불매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 롯데쇼핑몰 입점을 바라는 서명운동이 철회된 것이다.
반면 재래상인들은 비대위를 결성해 쇼핑몰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롯데가 서울시에 제출한 ‘특별계획구역(I3·I4·I5) 세부개발계획 결정(안)’에 따르면, 복합쇼핑몰의 부지 면적은 2만3741㎡, 영업면적은 23만1611m²(약7만200평)에 이른다. 표준규격 축구장(105m×68m) 32개 크기다.
롯데는 이 부지에 총 5000억원을 들여 백화점, 공연장, 롯데시네마(영화관), 패스트푸드, 업무시설 등을 지을 예정이다.
이 시설이 들어서면 불과 100~3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상암동 상점가 100여곳은 물론, 5km 반경 내에 있는 8500여개의 상점과 재래시장, 3만여 명의 중소상인들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마포농수산물시장, 마포구 망원시장, 은평구 증산종합시장, 은평구 수일시장 등은 롯데쇼핑몰과 직선거리 1km 이내에 있다.
비대위는 재벌복합쇼핑몰·아울렛 출점저지 전국 비대위, 전국유통상인연합회, 참여연대 등 9개 시민단체와 함께 지난 11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중소상공인과 지역경제 파괴하는 롯데쇼핑몰 출점을 즉각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등 롯데 측을 압박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사회가 들끓고 있는 가운데, 한편으론 양측 간 타협점이 조심스레 모색되고 있다.
롯데는 재래상인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대형마트(롯데마트) 입점을 사실상 철회한 것으로 전해진다. 상인단체들 간에도 미묘한 입장차가 감지되고 있다. ‘무조건 반대’였던 기존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조건부 반대’로 흐름이 바뀌고 있다.
‘상암동 롯데쇼핑몰 반대 비상대책위원회’ 정광욱(54) 간사는 “호텔과 백화점 입점까지 반대하는 건 아니다. 쇼핑몰, 상점, 식당가 등 각종 판매시설을 최소화하고 특히 기존 상권과 겹치는 종목은 입점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종갑 마포구의원(상암·성산)은 “지역 중소상공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주민들이 만족할 수 있는 시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지하 면적의 일정 부분을 지자체에 사회적 활용 용도로 내놓고, 문화시설을 최대한 늘리겠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다”며 “지역 상인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여러 각도에서 사업성을 재검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