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로’ 받아들이되 ‘北항공기’는 거절
‘어려운 중소항공업계 배려’ 해석도
지인들 “청백리 삶…저가항공 당연”
평양까지 가는 서해직항로는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처음으로 열렸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전용기를 타고 분단 50여년 만에 최초로 북한 상공을 비행했다.
하지만 이후 정부 차원에서 북측 하늘 길을 이용한 사례는 거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정상회담 때 총 300명의 대표단과 함께 육로를 통해 북한을 방문했다.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을 위해 2011년 12월 방북했을 당시도 육로였다. 이 여사 측 13명, 현 회장 측 5명 등 18명으로 구성된 방북조문단은 경기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통해 걸어서 방북했다.
이번 이 여사의 방북도 원래는 육로를 이용하기로 했다가 변경됐다. 지난해 11월 남북간 최초 실무접촉에서 김대중평화센터와 북측은 육로로 평양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 정부는 이 여사 측으로부터 ‘육로 방북’이 담긴 북한주민접촉신고서를 접수했다.
하지만 지난 6일 개성 실무접촉 때 북측이 이 여사 측에게 방북 편의를 위해 항공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인 김성재 전 문화부 장관은 “지난 2011년 12월 (이 여사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조문차 방북 때) 도로 사정이 안 좋아 힘들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귀한 분이 오시는데 잘 오실 수 있도록 비행기로 모시라’라고 해서 북측이 항공편을 제안했고, 원하면 자신들이 비행기를 보내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 측은 ‘항로’는 받아들이되 ‘항공기’는 거절하는 중립적인 선택을 했다. 북측이 항공기까지 제공하겠다고 나선 마당에 굳이 육로를 고집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만 북한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들어오는 건 국내외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부담이 될 수 있다. 이 여사에게 제공할 북측 항공기가 최근 새로 장만한 김정은 위원장의 전용기일 것이란 추측과 함께 “순안공항을 국제수준으로 끌어올리라”는 김 위원장의 지시로 최근 증축된 평양 공항을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는 말까지 돌았기 때문이다.
이 여사 측은 국내 저가항공인 이스타 항공을 택했다. 여러 저가항공사 중 왜 이스트인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30일 CNB와 통화에서 “비용이 저렴해서 저가항공을 택했다”고 짧게 말했다.
이스타 항공 소속의 전세기는 내달 5일 11시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이 여사 일행이 돌아오는 8일 오전 11시까지 4일간 북한 땅에 머무른다. 비행기 한 대를 수일간 빌린 터라 비용만 따진다면 육로가 훨씬 저렴하다.
따라서 경비 문제 뿐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 저가항공의 최초 북한 착륙이라는 상징적 의미, 평소 몸에 밴 검소함 등이 고루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저가항공의 역사는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2005년 8월 한성항공(현 티웨이항공)이 저비용항공사로 처음 취항했다. 이후 대부분 방북이 육로로 이뤄진 점을 감안하면 이번 저가항공의 평양행은 사상 처음이다.
저비용항공기는 기내식이나 신문·텔레비전·게임·음악 등의 서비스를 없애고 최소한의 기내 서비스만 제공하며, 공간이 대형항공기에 비해 좁다. 이 여사가 94세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선택이다.
일각에서는 대기업계열 항공을 일부러 피한 것이란 해석도 내놓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제주항공(Jeju Air), 진에어(Jin Air), 에어부산(Air Busan), 이스타항공(Eastar Jet), 티웨이항공(T'way Air) 등 5개 저비용항공사가 국내선과 국제선을 운항하고 있다.
진에어는 대한항공 계열이며, 에어부산은 아시아나항공이 출자했다. 제주항공은 애경그룹 계열이다. 티웨이항공은 대기업계열은 아니지만 경영난으로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2010년 신보종합투자가 150억 원에 인수했다.
반면 이스타 항공은 대기업 출자나 인수합병을 거치지 않은 유일한 중소기업이다. 2007년 설립해 2009년 첫 취항했다. 2009년에 보잉 737-600 항공기 1대, 보잉 737-700 5대를 임대 도입해 출발했으며, 현재 국내선과 말레이시아 쿠칭, 일본의 고치와 오사카, 히로시마를 비롯해 홍콩, 태국 푸껫, 중국 상하이 등지에 부정기 국제선 전세기를 운항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번 항공사 선택에 이 여사의 철학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대형항공 보단 저가항공, 저가항공 중에서도 순수 중소기업 항공사를 택한 데는 숨은 메시지가 담겼을 것이란 추측이다.
한 저가항공사 관계자는 “94세 고령인 이 여사가 저가항공을 이용해 평양에 갔다는 것 자체로, 작은 비행기가 불편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므로 메르스 여파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항공업계에 큰 힘이 되고 있다. 홍보효과가 상당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기다 이 여사의 검소한 생활습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여사는 청백리(淸白吏)라 칭할 만큼 청렴·근검을 실천해왔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영부인이었던 이 여사를 인터뷰했던 한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일화는 유명하다.
인터뷰 전날 청와대에서 전직대통령 초청 만찬이 열렸는데 그 테이블을 장식한 꽃꽂이가 하루만에 사라진 걸 보고 이 여사는 내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1회용으로 사용된 게 큰 낭비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뷰 장소인 청와대 본관 제2부속실에 그 꽃꽂이가 다시 등장했다. 이 여사는 “알고보니 꽃이 여기에 와 있었네요”하면서 크게 흐뭇해했고 대담을 진행했던 기자들은 큰 감명을 받았다.
2012년 9월 91세 생일인 망백(望百)을 맞아 제주를 방문했을 때도 고급호텔이 아닌 리조트에서 머물면서 보육원을 방문해 소외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이 여사를 만난 우근민 당시 제주 지사의 부인 박승련씨는 “이 여사의 열정적이고 검소한 모습이 정말 놀랍다”고 전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역도 이 여사의 뜻에 따라 역대 대통령 중 크기가 가장 작다. 봉분, 비석, 상석, 추모비 등을 합쳐 264제곱미터(16mX16.5m)에 불과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묘역 3600제곱미터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묘역 1600제곱미터보다 훨씬 작은 규모다.
야권의 한 중진의원은 “한평생 근검절약을 실천해온 이 여사이기에 저가항공을 이용하는 게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며 “다만 고령이라 좀 더 편한 방법을 택하셨으면 좋았겠다는 염려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평양 체류 기간 중 이 여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 2011년 조문 방문 시 사용한 백화원초대소와 묘향산호텔에 묵을 예정이다. 평양산원, 애육원, 아동병원, 묘향산을 방문한다. ‘6·15공동선언’의 조항을 남북 양쪽 모두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도 전할 것으로 알려졌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