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앞서 엘리엇이 합병비율을 문제 삼아 낸 ‘주주총회 소집통지 및 결의금지 가처분’에 대해서도 삼성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캐스팅보트를 거머쥔 국민연금 또한 합병에 반대표를 던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엘리엇은 주총 결과에 상관없이 삼성을 상대로 한 공격행위를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삼성 또한 오너일가의 무리한 지배력 강화 시도가 이번 사태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주총에서 이기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을 안게 됐다. 엘리엇은 어떤 식으로 삼성의 발목을 잡을까, 삼성은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을까? (CNB=도기천 기자)
엘리엇, 주총서 합병승인 돼도 국제소송 가능성
과거 국제원조기금까지 압류…한국선 ‘주주권리’
“총수일가 경영승계 원인제공…재벌도 반성해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50부(김용대 민사수석부장)는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KCC를 상대로 낸 자사주 매각금지 가처분 신청을 7일 기각했다. 삼성물산은 백기사로 나선 KCC에게 주총 의결권을 주기 위해 자사주 지분 5.96%를 매각했는데 엘리엇이 이를 문제 삼아 벌어진 송사였다.
법원은 자사주 매각의 처분 목적이나 방식, 가격, 시기, 상대방 선정 등이 모두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자체가 삼성물산과 주주에게도 손해라고 보기 어려운 만큼 자사주 매각을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은 앞서 엘리엇이 ‘삼성물산 주주총회를 막아달라’고 낸 가처분 신청도 기각한 바 있다. 삼성물산 주식 가치가 과소평가돼 주주이익에 반한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제일모직 1주당 삼성물산 0.35주의 합병비율은 관련 법령·주가에 따라 산정된 것으로 불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법원의 이같은 판단은 오는 17일 열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승인 주주총회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물산 지분 11.6%를 가진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그동안 합병 찬성이냐 반대냐를 놓고 고심해 왔는데, 사실상 법원이 합병의 정당성을 인정해준 셈이 돼 반대표를 던지기가 부담스런 상황이 됐다. 국민연금은 그동안 “재무적 투자자로서 유·불리를 따져 결정 하겠다”며 즉답을 피해왔다.
삼성물산 측은 한껏 고무된 표정이다. 그동안 삼성과 엘리엇은 피말리는 일전일퇴를 거듭해왔다. 법원이 지난 1일 엘리엇이 제기한 ‘합병주총 소집통지 및 결의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틀 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내자 다시 비상이 걸렸다.
삼성물산 측은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목표주가를 근거로 삼는 등 국내 시장 현실을 도외시한 보고서라며 ISS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자료를 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이번 판결은 엘리엇의 주장에 법원이 쇄기를 박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법원은 지난 가처분 기각 때와 달리 합병을 추진할 만한 경영상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적시해 삼성에게 힘을 실어줬다.
삼성물산 측은 “무차별 소송을 통해 주주들의 정당한 의사결정 기회마저 원천봉쇄하겠다는 해외 헤지펀드의 의도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이라고 입장자료를 통해 밝혔다.
주총 결과 관계없이 삼성 공격 ‘가속’
하지만 쉽게 물러날 엘리엇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엘리엇이 주총 결과에 관계없이 삼성에 대한 적대행위를 통해 이윤을 거둘 것으로 내다봤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엘리엇이 해외에서 큰 돈을 번 여러 사례들은 전형적인 ‘알박기’ 수법”이라며 “무자비한 방식으로 인해 벌처펀드라는 명성을 얻은 엘리엇인 만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벌처(Vulture)는 죽은 동물의 고기를 뜯어 먹고 사는 독수리는 이르는 용어다. 투자업계에서는 기업의 약점을 인정사정없이 파고들어 이익을 내는 헤지펀드를 ‘벌처펀드(Vulture fund)’라 부른다.
엘리엇이 ‘벌처펀드’라는 악명을 얻게 된 곳은 페루였다. 엘리엇은 1996년에 부도가 났던 액면가 2070만 달러 페루채권을 1140만 달러에 샀다. 이후 미국은 중남미 국가들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성장을 도와줘 과실을 나눈다는 ‘브래디 플랜(Brady Plan)’을 제시했다.
그러자 엘리엇은 페루가 그동안 내지 않은 이자까지 합쳐서 5800만 달러를 지급하지 않으면 브래디 플랜이 집행되지 못하도록 하겠다며 소송을 냈다. ‘알박기’를 한 것. 뉴욕 법원은 엘리엇의 손을 들어줬다. 페루 정부는 엘리엇에게 전액 물어줬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알박기’ 판을 더 크게 벌였다. 엘리엇은 액면가 6억3천만 달러 채권을 7% 정도 밖에 안 되는 4800만 달러에 매입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이자까지 합쳐서 23억 달러를 내놓으라며 소송을 걸어 이겼다.
아프리카에서는 국제기구의 원조자금 마저도 채무 갚는데 먼저 써야 한다며 지급을 중단시켰다. 국제원조자금을 볼모로 한 사상 초유의 딜이었다. 해당국들은 원조금을 받기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엘리엇의 요구를 들어줬다. 엘리엇은 이런 방식으로 콩고에서 2000만 달러에 산 부실채권으로 9000만 달러를 받아냈다.
엘리엇은 미국 내에서도 ‘알박기’ 투자를 강행했다. 2008~2009년 세계금융위기로 제너럴모터스(GM)가 파산위기에 처했을 때 GM의 자회사 델파이를 헐값에 사들인 뒤, 미국정부를 상대로 델파이의 채무를 탕감해주고 자금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GM을 문 닫게 만들겠다고 압력을 넣었다.
델파이로부터의 안정적인 부품 공급 없이는 GM이 굴러갈 수 없다는 약점을 알고 GM회생작업에 알박기를 한 것. 미국 정부는 엘리엇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줬고, 엘리엇은 델파이를 재상장시켜 천문학적인 이익을 챙겼다.
이번에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반대하는 것도 전형적인 알박기 행태로 보인다.
엘리엇은 삼성물산에 오래전부터 투자하고 있던 주주가 아니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의 합병 물밑 작업이 진행되던 올해 3월부터 삼성물산 주식을 매집했다. 5월 26일 합병 발표 직전까지 공시의무 지분율 5%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4.95%를 갖고 있다가 합병 발표 직후 지분율을 7.12%로 올리며 제3대 주주로 등극했다. 그리고 합병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엘리엇이 향후 어떤 액션을 취할 지는 주총에서 합병이 승인될 경우와 무산될 경우로 나눠진다.
삼성물산이 주총에서 승리하려면 최소 47%의 동의(참석률 70%기준)를 얻어야 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확실한 우호 지분은 계열사, 이건희 회장, KCC를 모두 합쳐 19.95%에 그친다. 11.6%를 가진 국민연금을 비롯한 중립지대에 있는 소액주주들이 움직여줘야만 하는 상황이다.
합병이 무산될 경우, 엘리엇은 기존 주장대로 합병비율 재조정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제일모직 1주당 삼성물산 0.35주의 합병비율은 삼성물산 가치를 저평가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통해 삼성물산 지분가치를 높여 막대한 이윤을 취하겠다는 게 엘리엇의 셈법이다.
이번 합병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의 경영승계와 맞물려 반드시 넘어야할 산인만큼, 삼성으로서는 엘리엇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미 법원이 합병비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 내린 만큼 엘리엇에게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전망이다.
합병안이 통과될 경우엔 주주총회 결의 무효 확인소송과 주식매수 청구권 행사가격 재조정 소송을 동시에 진행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주식매수청구권은 주주총회에서의 특별결의사항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갖는 주주가 회사에 대해 자기가 보유한 주식을 정당한 가격으로 매수해 줄 것을 청구하는 권리다. 양사가 정한 주식매수청구권 가격은 5만7234원으로 현 시세보다 낮은 수준이다.
엘리엇은 최근 삼성물산의 주주인 삼성SDI와 삼성화재 지분을 각각 1%씩 매입했는데, 향후 재판을 염두에 두고 두 회사의 발목을 잡겠다는 포석으로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국내 법정은 합병비율 등은 자본시장법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법률상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상황이다.
따라서 삼성물산이 승소할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더라도 안심할 순 없다. 엘리엇의 과거 행태로 볼 때, 국제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여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물러날 가능성도 있다?
특히 투자업계와 법조계는 투자자와 국가 간 소송(ISD)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진국들은 두 회사의 합병비율을 정할 때 시가총액, 자산규모 등을 함께 반영한다. 합병시점의 주식시세(시가)만을 기준으로 삼는 국내법이 불리할 수 있다.
만약 ISD 판결 결과 합병비율이 불합리하다는 판결이 나오면 엘리엇은 각종 재판비용과 투자자금, 이자 등에 대한 천문학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된다.
한화투자증권에 따르면 주가 기준과 자산 기준의 중간 값으로 합병비율을 계산할 경우, 엘리엇이 가져갈 차익은 약 2조~3조원에 달한다.
한편 가능성은 적지만 엘리엇이 시세차익만 남기고 조용히 물러날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8일 현재(종가기준) 삼성물산 주가는 6만3000원. 엘리엇이 삼성물산 주식을 집중 매집한 3~6월보다 삼성물산 주가는 10%이상 올랐다. 엘리엇은 5만원~6만원선에서 주식을 매집한 것으로 추정된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1112만5927주)를 갖고 있다. 현 시세로 7009억원어치다. 투자업계에서는 이미 엘리엇이 1000억원 가량의 시세 차익을 거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장기간에 걸쳐 주가를 견인한 뒤, 삼성 측에 주식을 팔거나 장내에서 소리소문 없이 매도하고 차익을 챙겨 자기나라로 돌아갈 가능성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엘리엇의 주식매집 이후 삼성물산 주가가 상당부분 오른 상태라 어떤 경우가 오든 엘리엇이 잃을 것은 없어 보인다”며 “헤지펀드들이 주가가 오를 만큼 오른 미국과 일본을 떠나 우리나라로 모이고 있는데, 삼성물산이 대표적인 먹잇감이 되고 있다”전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총수일가의 이익을 위해 합병하려다보니 이런 문제가 생겼다. 멍석(원인)을 깔아준 사람이 들어온 사람만 나쁘다고 하는 형국”이라며 재벌의 각성도 함께 촉구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