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 두 기업이 시련을 겪는 동안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리던 울산 경제 또한 절벽 위에 선 신세가 됐다. CNB가 전운이 감돌고 있는 울산 현지를 지난 28일 다녀왔다. (CNB/울산=도기천 기자)
현대차 ‘충칭’ 교두보 삼아 정면돌파
현대重 실적 반등…죽느냐사느냐 기로
노사관계 훈풍…넘어야 할 고비 산적
현대차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문모(56) 씨는 울산 경기가 요즘처럼 힘들 때가 없었다고 하소연 했다.
문씨는 20여년 전 손위 처남의 권유로 대구에서 울산으로 이주했다. 문씨의 회사는 현대차 계열사의 각종 화물을 운반하고 있는 물류회사다. 이곳에서 대형화물차를 몰고 있는 문씨는 “예전엔 밤낮없이 운송 주문이 쏟아졌는데 지금은 며칠에 한번 꼴로 뛴다(운행한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인근의 한 식당주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현대 직원들로 붐볐는데 지금은 (현대중공업) 유니폼을 입은 손님들의 숫자가 절반 이상 줄었다”고 전했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국제금융위기 등에도 아랑곳 않고 수출 1000억달러를 달성하는 등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리던 울산이 휘청거리고 있다.
지역 경제는 물론 한국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현대차와 현대중공업이 글로벌 시장 악화가 장기화 되면서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엔화 가치는 일본 당국의 엔저 기조 유지로 1년새 10% 넘게 하락했다. 100엔당 달러가 1달러 선에서 현재 0.8달러 대까지 하락했다. 100만엔짜리 일본차를 사려면 예전엔 1만달러가 필요했는데 지금은 8000달러면 살수 있단 얘기다. 상대적으로 원화가치는 높아져 현대차를 사려면 예전보다 더 많은 달러를 줘야한다.
중국에서는 현지 완성차 업체들이 싼 값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내놓으면서 현대차가 고전하고 있다. 지난 달 현대·기아차의 중국 판매량은 작년 5월보다 9.9% 줄어 올 들어 판매 감소폭이 가장 컸다.
2012년 4월 최고가 26만8500원을 기록했던 현대차 주가는 최근 13만원대까지 밀렸다. 울산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액은 6042만원으로 전년보다 288만원이나 줄었다.
하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그나마 신형 투싼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현대차 판매 전선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다.
현대차로서는 투싼처럼 잘 팔리는 차종의 생산을 확대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먹히는’ 대책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2일 노사가 투싼 등 인기차종에 대한 공장간 물량 조정에 전격 합의했다. 물량 조정 협의를 시작한지 1개월 만에 신속하게 합의안을 도출한 것은 처음이다.
이경훈 현대차 노조위원장은 지난 9일 임단협 교섭장에서 “회사가 처한 위기상황에 대해 공감하며, 노사가 함께 극복하자”며 사측과 힘을 합칠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현대차 손익에 결정적 영향을 끼쳐온 노사 분규가 위기상황 앞에서 수그러들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해외 주식형펀드에 한시적으로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것 등을 골자로 한 환율정책(원화 약세 유도)을 내놓으면서 투자심리가 호전된 점도 긍정적이다. 원화의 약세 반전이 수출기업들의 실적과 주가를 견인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현대차 주가는 바닥을 다지는 모양새다.
정 회장은 지난 3월 미국 판매·생산법인을 둘러본데 이어 중남미 시장 교두보가 될 기아차 멕시코 신공장 건설현장을 방문, 북미·중남미 전략을 점검했다.
미국은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각축장이다. 엔저·달러 약세라는 악재 속에 현대차는 미국 앨라배마 제1공장 근처에 2공장을 설립할 계획이다. 세계적으로 수요가 늘고 있는 SUV 판매량 확대를 통해 북미 시장 점유율을 높이겠다는 정면돌파 전략이다.
정의선 부회장은 올해만 중국에 3번 다녀왔다. 지난 3월 현대차 충칭 4공장, 허베이 5공장 부지를 직접 방문해 현장을 점검했고, 4월에는 창저우 공장 착공식에, 이달에는 충칭공장 착공식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차는 충칭 공장 건설을 통해 중국 중서부 지역을 공략할 계획이다. 중서부는 연해 지역에 비해 자동차 시장 수요가 3분의 1에 불과해 향후 잠재력이 크다.
이번에는 현대중공업으로 가봤다. 과거 울산 거리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출퇴근 부대’는 크게 줄었다.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1조원대 영업적자를 내 인력 구조조정 바람이 불면서 예전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기 힘들다.
인근 식당에서 만난 한 직원은 “회사가 어렵다보니 걱정이 많다. 밀려드는 주문에 비명을 지르던 시절이 그립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덕분에 먹고 산다는 한기승(49) 씨는 “원청(현대중공업) 보다 하청이 더 죽을 맛”이라며 “몇 년 전에 비하면 일감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하소연했다.
현대중공업은 올해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1분기 매출 12조2281억원, 영업손실 1924억원, 당기순손실 1252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지난 분기보다 11.7% 감소했다. 6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하면서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는 최근 세계 조선소 순위에서 3위로 밀렸다.
하지만 지난 4월까지 10억달러 안팎이던 조선수주고는 환율·유가 안정 등 글로벌 경기 회복세에 힘입어 지난달 12.1억 달러를 기록했으며, 이달에는 15억 달러선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바닥을 쳤다는 분석이 조심스레 나온다.
동부증권은 “조선수주 증가로 실적이 개선추세에 있으며, 해양사업 부문에서도 실적개선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고 예측했다. 신한금융투자는 조선부문은 3분기에 흑자 전환, 해양부문은 연간 흑자 전환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대차·현대중 노사 모두 강경일변도에서 벗어나 위기상황에 공감하고 있긴 하지만 넘어야할 산은 여전히 높다.
최근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이 인위적인 인력조정을 않겠다고 선언해 일단락되는듯했던 사내 갈등은 정규직 노조와 사무직노조의 창구단일화 문제를 놓고 다시 불거졌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분리교섭을 주장하고 있는 회사를 상대로 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현대차 노조도 통상임금에 정기상여금, 복리후생비, 휴가비 등을 포함해 달라며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울산이 다시 일어서려면 글로벌 환경변화를 기다리기 이전에 현대차·현대중 노사와 하청·연계산업으로 연결된 지역사회가 함께 손을 잡고 위기극복에 나서야 한다”며 “하반기에는 미국의 금리인상 등 대외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예상되는 시기인 만큼 우리정부도 보다 적극적으로 엔저 대책 등 환율 방어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CNB/울산=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