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모든 수식어는 수조원대 매출 부풀리기를 통한 사기극이었다. 이 반전 드라마의 ‘세트장’이 된 곳이 모뉴엘의 제주 신사옥이다.
CNB가 뒤늦게 이곳을 찾은 이유는 젊은 벤처직장인 수백명의 꿈이 한이 돼 서려있기 때문. 부도덕한 사주에 의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그들의 꿈은 그대로 제주에 머물러 있다. (CNB=제주/도기천 기자)
수조원 대출사기…진짜 피해자는 직원들
제주 신사옥 부푼 꿈 ‘마른하늘 날벼락’
“반성 없는 금융당국·은행이 더 문제”
현재 제주 사옥은 채권단이 파견한 용역업체 직원 3~4명이 돌보고 있다. 건물 전체가 봉쇄된 상태며 부설 어린이집도 굳게 닫혀 있다. 건물 앞마당에는 각종 폐기물과 쓰레기가 쌓여가고 있다. 법원의 파산선고로 모뉴엘 직원들은 오래전 이 건물을 떠난 상태다.
모뉴엘의 제주 이전 계획이 알려진 때는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이 회사의 사기대출이 정점으로 치달을 때였다.
모뉴엘 간부들이 제주도청을 방문해 이전 의사를 밝히자 우근민 당시 제주지사를 비롯한 도청 직원들은 한껏 고무됐다. 잘나가는 글로벌 중견기업이 산업기반이 취약한 제주도로 온다니 더없이 반가웠다.
이듬해 모뉴엘이 제주첨단과학기술단지 내 2만644㎡ 부지를 사들이자 제주도는 ‘제주 이전 수도권기업에 대한 설비투자보조금’ 등의 명목으로 30여억원을 상환 조건없이 지원했다.
제주컨트리클럽, 관음사, 절물자연휴양림, 사려니숲길 등 한라산 북부지역 천혜의 자연 속에 자리잡은 이 건물은 도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있는 ‘성냥갑 빌딩’과는 차원이 달랐다. 새가 양날개를 펼친 듯한 모습은 잘 지어진 휴양 호텔처럼 보였다.
또 인근에 제주대, 제주국제대, 한국폴리텍1대학제주캠퍼스 등 대학들이 밀집해 있고 다음카카오 본사, 이스트소프트 제주지사 등이 자리 잡고 있어 산학 연계를 펴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였다.
폴뉴먼과 로버트레드포드가 출연한 세기의 명작 영화 ‘스팅’에 등장하는 세트장처럼 정교하게 설계된 이곳이 ‘가짜’라고 의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제주 사옥, 사기대출 위한 '세트장'?
당초 모뉴엘은 올해 1월 제주로 본사를 옮길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지난해 2월부터 연구개발 인력 등 100여명을 선발대로 보내 제주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회사는 특히 어린 자녀를 둔 직원들을 배려했다. 사옥 내에 ‘모뉴엘프 어린이집’을 열어 엄마와 아이가 한 공간에서 함께할 수 있도록 했다. 각종 비용을 지급해 직원들이 제주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고, 직원들은 집을 빌리거나 샀다. 맞벌이 부부들 중에는 한쪽이 회사를 그만두고 제주로 내려온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회사는 지난해 10월 20일 돌연 법원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를 돌려막다 사고가 터진 것.
대부분 회사구성원들은 언론보도를 보고 이 사실을 알았다. 그만큼 사기극의 주범들은 주도면밀했다. 제주 본사에 있던 직원들은 충격이 더 컸다.
모뉴엘은 허위 서류로 7년 동안 3조4천억원의 불법대출을 일으켰다. 검찰에 따르면 박홍석 대표 등은 2007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홈시어터 컴퓨터(HTPC) 가격을 수십배 부풀려 허위 매출전표를 만든 뒤, 이를 근거로 수출채권을 발행해 금융권에 할인 판매하거나 담보로 잡혀 돈을 빌려왔다.
서류에는 1대당 시중가격 8천∼2만원인 HTPC가 200만∼300만원으로 둔갑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위해 실사를 나오면 실제로 물건을 만드는 것처럼 꾸몄다.
모뉴엘은 KT 자회사인 KT ENS를 통해 가짜 채권을 만들어오다 여신규모가 점점 늘어나자 직접 허위수출에 나섰다.
기존 거래선을 유지하면서 무역보험 및 수출금융 한도를 늘리기 위해 전방위 금품공세를 폈다. 수출입은행과 KT ENS, 세무당국, 거래업체를 상대로 쓴 로비자금은 8억원을 넘었다.
모뉴엘은 채권 상환기한이 다가오면 또다른 허위수출을 꾸미는 수법으로 ‘돌려막기’를 했다. 금융권에 따르면 모뉴엘이 법원에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기 직전인 지난해 9월말 기준 모뉴엘의 전체 은행권 여신은 6768억원에 이른다.
기업은행이 1508억원으로 가장 많고 산업은행(1253억원), 수출입은행(1135억원) 외환은행(1098억원), KB국민은행(760억원), 농협(753억원), 기타(261억원) 순이다. 이 가운데 담보가 설정된 대출은 3860억원, 담보가 없는 신용대출은 2908억원에 달했다. 수출입은행은 여신 전액을 담보 없이 빌려줘 신용대출 규모가 가장 컸다.
법원이 최종 파산선고 결정을 내림으로써 신용대출은 전액 대손(손실) 처리됐다. 담보물에서도 얼마나 건질 수 있을지 미지수다. 금융권에서는 피해규모가 최소 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법원은 모뉴엘 자산을 채권단에 분배하는 절차를 밝고 있다. 감정가 500억원인 제주사옥은 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지난 4월 제주지방법원에 임의경매를 신청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감정가격이 높아 새 주인을 찾기가 녹록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기업이 매입 여부를 타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잠잠한 상태다.
김재식 변호사(법무법인 에이펙스)는 CNB와 통화에서 “모뉴엘 사건은 단순한 금융사기사건이 아니다. 사주의 부도덕한 경영으로 제주에서 꿈을 펴고자 했던 젊은 직장인 수백명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될 때까지 금융당국이 손을 놓고 있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며 “두 번 다시 선의의 근로자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기업 감시를 강화하고 관련 제도를 시급히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CNB=제주/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