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실적 평가사이트 CEO스코어의 최근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30대 그룹 3곳 중 2곳의 해외매출이 줄어들었고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은 무려 9%가까이 감소했다.
30대 그룹 중 해외매출을 공시하지 않거나 전년과 비교가 어려운 부영과 미래에셋을 제외한 28개 그룹 중 해외매출이 감소한 곳은 18곳(64.3%)에 달했다. 이에 따라 30대 그룹 해외매출 비중도 63.8%에서 63.4%로 0.4%포인트 떨어졌다.
특히 삼성, GS, 에쓰-오일 등 IT·석유사업을 주력으로 삼는 기업들의 타격이 컸다. 엔화 약세(엔저), 원화 강세 기조가 이어지며 수출이 고전했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 이후 이어진 엔화 약세는 도요타, 소니 등 일본 기업들의 수출 증가와 실적 개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일본의 3월 월간 무역수지는 엔저와 유가 하락 등에 힘입어 2년 9개월 만에 첫 흑자를 냈다. 상대적으로 한국 수출기업들은 원화강세(달러약세)로 환차익 등 수익이 줄었다.
30대 그룹 중 해외매출액이 가장 크게 줄어든 곳은 삼성으로 292조9000억원에서 267조1000억원으로 25조8000억원(8.8%) 감소했다. 삼성전자의 해외매출액이 20조4000억원 줄었고, 삼성디스플레이와 삼성중공업, 삼성전기 등도 1조원 이상 감소했다.
GS가 38조5000억원에서 35조3000억원으로 3조2000억원(8.3%) 줄며 감소액 2위에 올랐고, 이어 에쓰-오일(감소액 1조3000억원, 6.9%), 롯데(1조2600억원, 9.4%), 두산(1조700억원, 5.9%) 등이 뒤를 이었다. 롯데도 석유화학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의 해외매출이 지난해 1조원 이상 감소하며 상위권에 들었다.
CJ(8000억원, 17.9%), 대림(7200억원, 13.9%), 한화(7000억원, 14.1%), 효성(6800억원, 10%), 영풍(6200억원, 17.6%) 등도 지난해 해외매출액이 5000억원 이상 줄었다.
올해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와 와이즈에프엔 등에 따르면, 지난달 30일까지 1분기 실적을 발표한 상장사 가운데 증권사의 실적 컨센서스(추정치)가 있는 100개사 중 38곳이 영업이익 전망치를 10% 이상 밑도는 ‘어닝 쇼크’ 상태였다.
제일모직의 1분기 영업이익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60.6% 감소한 60억원으로, 시장 전망치 426억원을 크게 밑돌았다.
올해 들어 주가가 급등한 한미약품의 1분기 영업이익은 100억원 수준의 시장 기대치와 달리 작년 같은 기간보다 88.2% 감소한 21억원에 그쳤다.
삼성SDI,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풍산, 웅진씽크빅, GS건설, LG상사, 두산, SK네트웍스, 현대산업, LG하우시스 등도 영업이익이 추정치에 크게 못 미쳤다. 현대로템, 현대중공업, 두산엔진, LG생명과학 등은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이런 가운데 재계순위 1,2위인 삼성과 현대차그룹으로의 쏠림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다. 30대 그룹 1162개 계열사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을 집계한 결과 총 41조5690억원이었는데, 이 중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계열사 118곳의 당기순이익이 33조6760억원으로 30대 그룹 전체의 81%를 차지했다.
이는 지난 2010년 47.5%의 두 배 수준이다. 두 그룹의 당기순이익이 30대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1년 49.2%였으나, 2012년 69.1%로 급상승한 뒤 지난해까지 매년 6%포인트씩 높아졌다.
문제는 이같은 결과가 두 그룹의 약진 때문이 아니라 나머지 28개 기업의 부진 때문이라는 점이다.
30대 그룹 전체의 실적이 수년 새 반토막 나는 상황에서 두 그룹의 순익도 줄었지만 그나마 다른 기업들보다는 적게 줄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선전한 모양새가 된 것.
삼성그룹의 순이익은 2010년 24조4980억원에서 지난해 20조9990억원으로 14.3%(3조4990억원) 감소했고, 현대차그룹은 13조5400억원에서 12조6770억원으로 6.4%(8630억원) 줄었다. 반면 30대 그룹의 순익은 2010년 80조1510억 원에서 지난해 41조5690억원으로 무려 48.1% 감소했다.
각종 경제지표들도 기업들의 향후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다.
국내경기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전(全) 산업생산 지표는 2월에 2.2% 급등해 기대를 모았지만 3월에는 전월보다 0.6% 감소하는 등 불안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내수부진은 물가상승률 지표를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석 달째 마이너스를 기록해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4월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0.4% 오르는데 그쳤다. 작년 같은 달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2월 0.8%로 떨어진 이후 5개월 연속 0%대를 기록했다.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디플레이션(Deflation·경기침체 속 물가하락) 진입 가능성에 대한 우려마저 나오는 상황이다.
수출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시점이 늦춰질 것이라는 관측이 퍼지면서 달러 가치가 최근 약세로 돌아서자 상대적으로 원화가 강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화 대비 원화 가치는 올해 들어 1.091% 상승했다.
한국의 최대 교역국 중 하나인 중국이 지난달 초 기준금리 인하 등 통화완화 조치를 내놓은 점도 수출에 악재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4월 수출액은 462억 달러로 작년 같은 달보다 8.1% 감소했다. 1월(-0.9%), 2월(-3.3%), 3월(-4.3%)에 이어 넉 달째 감소한 데다 감소 폭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월간 수출액 연속 감소 기록으로는 미국 금융위기 당시의 2008년 11월부터 12개월 연속 감소 이후 최장이다. 현 추세대로라면 연간 수출 성장세가 3년 만에 꺾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희망을 포기하긴 이르다. 일부 기업들이 예상치를 웃도는 1분기 실적을 내놔 그나마 위로가 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9일 시장 전망치 5조4412억원을 9.9% 뛰어넘는 5조9794억원의 1분기 영업이익을 발표했다. 이는 전분기 5조2900억원보다 13% 이상 증가한 것으로, 지난달 7일 발표된 잠정치(5조9천억원)를 소폭 상회했다.
KT&G의 1분기 영업이익은 전망치 2428억보다 76.5% 많은 4285억원이다. 효성은 1437억원 수준의 1분기 영업이익이 예상됐으나, 실제로는 이를 54.6% 웃도는 2222억원에 달했다.
전분기 대비 흑자전환에 성공한 SK이노베이션도 추정치는 2215억원이었지만 이보다 45% 많은 3212억원으로 1분기 영업이익이 집계됐다.
그 외 유가증권시장에서는 대한유화, 경남은행, 국도화학, 롯데케미칼, S&T모티브, 대림산업, LG디스플레이, S-Oil, OCI머티리얼즈, OCI, BNK금융지주, 한국항공우주, SKC, 대우증권, 서울반도체, 삼성전기, LG화학, 하나금융지주, 기업은행, LG생활건강, SK C&C, 바텍, 삼성테크윈, 현대미포조선 등이 ‘어닝 서프라이즈’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정부는 2분기부터 내수를 중심으로 경기 회복세가 확대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저유가, 저금리 속에 부동산과 증시 등 자산시장 회복세가 소비와 투자 심리 개선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사정은 녹록치 않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정부가 저유가·저금리라는 대외환경에만 기댈 게 아니라 기업들이 신성장동력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며 “유가하락이 그나마 효자노릇을 하고 있는데, 기름값이 오르고 가계부채 문제가 터져 나올 경우 장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디플레이션 우려가 지속되고 글로벌 환경이 악화되고 있어 더 이상 낙관론을 펼치기 어렵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주문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