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재개발은 4년 전 사업시행이 인가 됐지만 서울시의 ‘한양도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으로 보류되면서 조합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시가 허가권자인 종로구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CNB가 내막을 취재했다. (CNB=도기천 기자)
사직2구역 수년전 개발 인가, 아직 표류
서울성곽 복원사업에 막혀 조합원 피눈물
권익위 “서울시 좌지우지 할 권한 없어”
서울시, 권익위 답변 요구에 침묵 일관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 9일 사직2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조합(이하 조합)이 낸 사업시행변경인가 지연에 대한 이의신청에 대해 “종로구는 조속한 시일 내에 인가 여부를 결정해 조합에 통지할 것을 시정권고 한다”고 의결했다.
권익위는 권고 이유에 대해 ▲2012년 9월 20일 사업시행인가가 이뤄졌고 ▲2013년 10월 28일 사업시행변경인가 신청의 주요내용이 주민공람절차를 마친 점 ▲한양성곽 보전관리가 정비사업 시행과 무관해 보인다는 점 등을 들었다. 권익위는 해당 개발사업이 서울시가 ‘시기조정 및 취소’ 를 할 수 있는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서울시 종로구 사직동 311-10번지 일대 3만4268㎡의 대지에 5~15층 규모의 공동주택 12개동을 신축하는 이 사업은 지난 2012년 9월 종로구로부터 사업시행 인가를 받았다. 당시 총 190가구, 약 1천여명의 주민들이 50~60년 이상 된 노후한 주택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조합을 결성해 재개발을 추진한 것. 이듬해 10월에는 신축건물의 세대수를 456세대에서 486세대로 늘려 사업시행 변경인가 공람 절차를 마쳤다.
이때까지만 해도 개발이 순조로운 듯 했다. 하지만 2013년 11월, 서울시는 “개발사업지가 한양도성 성곽과 인접해 설계를 변경해야 한다”며 제동을 걸었고, 이후 사업은 지연됐다.
당시 서울시 한양도성도감과는 “사업지역이 한양도성 및 경희궁에 인접해 신축할 건물의 높이를 최대한 낮춰야 한다”는 의견을 종로구에 제시했다. 또 역사도심관리과는 “사업구역 내에 위치한 선교사 건물의 보존을 검토해 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시는 총 연장 18.627km의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본격적인 복원에 착수한 상태였다.
북악과 인왕, 남산과 낙산 네 개의 산을 잇는 한양도성은 현재 남아있는 수도 성곽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길고 오래됐다. 종로구·중구·성북구·용산구·서대문구 등에 걸쳐 있으며, 1396년(태조 5년) 조선의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됐고, 세종, 숙종 때 개축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청은 올해까지 복원을 마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할 계획이다.
시 공무원들, 종로구청 방문해 보류 요청
한양도성 사업에 발목을 잡힌 조합은 “건축물 높이를 낮추고, 선교사 건물의 이축 복원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문화재청과 종로구에 제안했다. 이후 조합은 선교사 건물 부지를 사들였으며, 새로 신축될 아파트 단지 내로 옮겨서 활용하는 방안을 내놨다. 조합의 이 안은 지난해 10월 문화재 현상변경 심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며칠 뒤 서울시 도시정비과장과 주거환경과장은 종로구청을 방문, 이 사업의 추진을 보류해 줄 것을 구두로 요청했다.
도시개발법 77조에 따르면 정비사업의 시행으로 인해 ▲정비구역 주변지역에 주택이 현저하게 부족할 경우 ▲주택시장의 불안정이 발생하는 경우 등에 한해 시가 허가권자(종로구)에 사업시행인가 시기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 또 정비사업이 당초의 사업시행계획이나 관리처분계획을 위반할 경우, 국토부장관이 인가권자 및 시행자에게 사업 취소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시의 한양성곽 복원사업은 이 경우에 해당되지 않는다. 권익위는 “사직2구역 개발사업이 성곽 복원사업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며 사업시행을 조속히 결정하라고 허가권자인 종로구에 통보했다.
궁지에 몰린 종로구는 서울시로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종로구청 도시개발과 관계자는 30일 CNB에 “수년전 이미 사업시행인가가 난 만큼 하루속히 재개발을 시행해야 한다는 게 변함없는 구의 입장”이라며 “다만, 성곽 복원에 대한 시의 의지가 확고해 시로부터 예산을 배정받고 있는 구 입장에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매몰비용(투자비용)을 청산해주고 사업을 중단하든지, 아니면 대안을 제시하든지 결단을 내려 달라고 수차례 시에 요청한 상태”라고 전했다.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서울시는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직 제2구역 개발에 관한 사항은 종로구 권한이며, 서울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며 “종로구와의 단순한 업무협의가 확대해석 된 것 같다”고 전했다.
권익위 관계자는 CNB에 “서울시 담당부서 과장들이 종로구 도시개발과를 방문해 해당사업을 보류해 줄 것을 요청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해당 사업이 한양성곽 복원사업에 어떤 지장을 주는 지에 관해 시에 답변을 요청했지만 아직 특별한 의견을 제출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시와 종로구가 개발사업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조합원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다.
재개발이 난관을 겪자 빈집이 하나둘씩 늘기 시작해 현재는 절반 가량이 이곳을 떠났다. 남은 주민들은 주택이 노후해 안전사고 위험에 직면한데다 빈집들이 방치되면서 치안 사각지대에 놓였다.
그동안 조합은 선교사부지 매입비, 이자, 조합운영비 등 약300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했다. 조합 관계자는 “한 달에 이자비용만 1억원 넘게 발생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개발 소식을 듣고 원주민으로부터 집을 사들인 투자자들도 수백억원의 자금이 묶였다.
한 50대 주민은 “이미 사업허가가 떨어진 곳인데, 새로 지을 아파트의 세대수를 늘리려고 사업변경신청을 한 것이 화근이 됐다”며 “박원순 시장이 자신의 치적에 눈이 멀어 종로구에 월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조합은 서울시청 앞에서 항의시위를 이어가며 박 시장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조속한 사업시행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서울시에 제출했다.
조합은 진정서에서 “인가권자인 종로구와 관리감독 기관인 서울시가 서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공무원들의 공권력 남용과 직무태만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로 인한 모든 피해는 조합원들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며 조속히 개발을 시행해 줄 것을 촉구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