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장에서 사외이사까지 서강대 출신 ‘장악’
새출발 KB금융 윤종규號, 시작부터 삐걱
정피아 남긴 상처…금융성숙도 80위로 추락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우리은행은 신임 사외이사 후보로 정한기 호서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홍일화 여성신문 우먼앤피플 상임고문, 천혜숙 청주대 경제학과 교수, 고성수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장 등 4명을 선임했다.
은행 측이 공개한 경력을 보면 이들 중 3명이 정치권 출신이거나 정치권과 관련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NH투자증권 상무, 유진자산운용 사장 등을 지낸 정한기 교수는 이광구 우리은행장과 같은 서금회 출신이다.
지난 2007년에 구성된 서금회는 박근혜 대통령이 2007년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탈락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금융권 서강대 동문들이 결성한 모임이다.
정 교수는 유진자산운용 사장 시절이었던 2011∼2012년 이 모임에 참여해 고참 멤버로 활동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2012년 19대 총선 때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에 공천 신청을 했으며, 대선 때는 선거 캠프에서 활동했다. 정 교수는 서금회 현 회장인 이경로 한화생명 부사장보다 2년 선배다.
서강대 출신의 한 금융권 인사는 “정 교수가 서금회 뿐 아니라 정치권 활동도 폭넓게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다른 사외이사들 역시 ‘정피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홍일화 고문은 1971년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시작해 한나라당 부대변인, 중앙위원회 상임고문, 17대 대통령선거대책위 부위원장 등 당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지난해 6월 산업은행 사외이사에 선임돼 오는 6월 임기가 끝나지만, 이번에 우리은행의 사외이사 후보에 올랐다. 천혜숙 교수의 경우 정치권 출신은 아니지만, 남편이 이승훈 청주시장(새누리당)인 점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이해충돌 방지책 ‘시급’
사외이사의 기본 책무는 CEO나 경영진을 감독하고 비리나 부조리, 경영상의 문제점은 없는지 등을 감시하는 자리다. 여권 출신 인사들이 자리를 꿰찰 경우, 외풍에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
특히 은행장과 사외이사가 같은 사조직 출신이라 심각한 ‘이해 충돌’의 우려가 제기된다. 사익 추구를 막기 위해 최근 제정된 김영란법 취지에도 맞지 않다.
우리금융이 관치 논란에 휩싸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에는 연임이 확실시되던 이순우 전 행장을 제치고 갑자기 서금회 출신의 이광구 행장이 선임돼 논란이 일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이팔성 전 금융지주 회장이 입방아에 올랐다. ‘금융권 4대 천왕’으로 통했던 이 전 회장은 한일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한 뒤,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로 활동하다 정부 출범과 함께 우리금융 회장이 됐다.
이 전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지주 회장을 역임했으며, 정치권과 연계된 각종 금융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이름이 오르내렸다.
지난해 KB사태를 겪으며 상처투성이가 된 KB금융에서도 서금회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임영록 당시 KB금융 회장과 이건호 국민은행장 간의 ‘주 전산기 교체’를 둘러싼 내홍에서 비롯된 KB사태는 금융당국의 경징계→중징계→징계불복→직무정지→이사회 해임결정으로 이어지며 100일 넘게 경영공백을 초래했다. 1등을 달리던 국민은행의 실적은 지난해 하반기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이 과정에서 임영록 전 회장은 물론 KB를 제재한 당시 신제윤 금융위원장, 최수현 금융감독원장까지 모피아(재무부+마피아)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KB금융 사태의 핵심 관련자 중 한명으로 지목돼 지난해 말 물러났던 박지우 전 국민은행 수석부행장은 지난 5일 있었던 KB금융지주 대표이사후보추천위원회에서 KB캐피탈 사장으로 내정됐다.
징계를 받고 낙마한 사람이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 복귀한 것을 두고 금융권에서는 박 내정자의 배경에 서금회가 있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일각에서는 당초 KB캐피탈 사장은 다른 사람으로 내정돼 있었으나 막판에 박 내정자로 바뀐 것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박 내정자는 서금회 창립 멤버로 2007년 창립 때부터 6년간 회장직을 맡았다. 2013년 회장직을 물러날 때 당시 서금회 핵심 멤버였던 정한기 교수는 “퇴임해도 벗어날 수 없다”며 벨트를 선물하기도 했다.
더구나 KB는 최근 비주류 출신인 윤종규 전 KB금융 부사장이 금융지주 회장에 선출되면서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크게 높아진 상태다. 광주상고를 나와 성균관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윤 회장은 정피아·모피아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이다.
그는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으로 이원화된 옥상옥(屋上屋) 구조를 깨는데 개혁의 방점을 두고 있다. 자신이 국민은행장을 겸임키로 하면서 임영록 전 회장이 없앤 지주사 사장직을 부활할 계획이다.
지주사 사장이 계열사 경영을 총괄토록 하는 한편 자신은 국민은행장의 역할에 더 충실하겠다는 전략을 추진 중인데, 이런 차에 발생한 정피아 논란은 윤 회장의 어깨를 처지게 하고 있다.
이처럼 금융권에 서금회 출신 인사들이 두루 포진하자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지난해 갑자기 우리은행장에 서금회 출신의 이광구 행장이 선임된 것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이제 사외이사까지 서금회 출신이라니 할 말을 잃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정피아가 남긴 상처는 금융시장의 경쟁력 약화로 나타나고 있다. 2007년 27위(세계경제포럼(WEF) 평가)였던 우리나라 금융시장 성숙도는 지난해 80위로 추락했다. 은행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순마진(NIM)은 지난해 1.79%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였던 2009년(1.98%)보다도 낮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야권의 한 고위인사는 “여야가 진통 끝에 겨우 김영란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런 낙하산 전횡이 곳곳에서 발생하니 법 정신이 무색해진다”며 “금융혁신의 시작은 외풍으로부터 독립”이라고 강조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