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기천기자 | 2015.01.12 13:57:37
여기다 지난해 악화일로를 걸었던 철강·조선·건설업계도 비장의 각오로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투자를 확대하는 기업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 경기회복 신호로 보기에는 이르다는 의견이 대세다. CNB가 달라지고 있는 재계 분위기를 살폈다. (CNB=도기천 기자)
삼성·현대차 투자 ‘청신호’…나머진 긴축
두산·롯데그룹, 상반된 새해 전망 ‘눈길’
위기의 철강·조선·건설업 비장한 새출발
전문가들 “경기 회복 언급 이르다” 신중
주요 그룹 총수와 최고경영자(CEO)들은 새해를 시작하며 하나같이 위기극복을 위한 ‘혁신과 도전’이라는 경영 화두를 던졌다.
대다수 기업의 새해 메시지에는 환율·초엔저·저유가의 불확실한 환경과 선진국의 가격역공, 신흥국의 추격으로 유발된 ‘넛크래커’ 위기를 반드시 돌파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비장감이 묻어났다.
새해 경영환경을 낙관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생존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다급함과 절실함이 ‘위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최근 228개사(대기업 70곳, 중소기업 158곳)의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기업은 절반 이상(51.4%)이 올해에 ‘긴축경영’(51.4%)을 하겠다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새해(39.6%) 때보다 크게 늘어난 수치다.
확대경영을 택한 곳은 대기업은 14.3%, 중소기업은 21.9%밖에 되지 않았다. 현 상황을 ‘장기형 불황’으로 평가한 기업은 66.7%로 지난 해(43.5%)보다 크게 늘어났다. 이들 기업이 내다본 내년 경제성장률은 기관 전망치보다 한참 낮은 3.3%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 삼성전자 실적이 바닥을 찍고 반등을 시작한 모양새를 보였다. 지난 8일 공시된 삼성전자 잠정실적은 여러모로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삼성전자, 영업이익 바닥 찍고 상승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에 5조2천억원의 영업이익(잠정실적)을 올렸다고 공시했다. 작년 3분기(4조600억원)보다 28.08% 증가한 실적이다. 2013년 4분기(8조3천100억원)보다는 37.42% 감소했다.
우선 4조원대 밑바닥까지 떨어진 분기 영업이익을 5조원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시장에서는 꽤 높은 점수를 주는 분위기이다. 삼성전자는 작년 3분기 영업이익이 약 3년 만에 처음 5조원 아래로 떨어졌지만, 4분기에는 무선사업부의 실적 회복 등에 힘입어 한 분기 만에 다시 5조원대를 회복했다.
물론 분기 영업이익 10조원 클럽에 들었던 2013년 3분기와 비교하면 여전히 반토막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하강 국면으로 추락하던 기조를 상승 국면으로 반전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업계 여론이다.
전망도 밝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전반적인 하강 국면에서 효자 노릇을 하며 실적 방어에 앞장선 반도체 부문이 올해도 괜찮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력인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는 글로벌 시장이 10% 중반대 고성장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예측된다. 가격 안정세만 유지된다면 나노 미세공정에서 경쟁사보다 한발 앞선 삼성전자가 메모리 부문에서는 독주를 계속할 전망이다.
약점인 시스템LSI 등도 지난해부터 글로벌 제휴와 전략적 협력 틀을 공고히 구축한 상태라 올해는 실적 반등에 이바지할 가능성이 있다.
권오현 대표이사 부회장이 신년사에서 강조한 사물인터넷(IoT)과 기업간거래(B2B) 사업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삼성전자가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전략 스마트폰 ‘갤럭시 S6’도 관전포인트다. 상반기 중에 출시해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각오다.
하지만 IT·전자업계의 특성상 1분기는 계절적 비수기라 본격적인 회복을 점치기는 이르다. 전자업계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일단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성공했지만, 안정적인 상승 기류를 타려면 새해 1분기 실적이 최소한 작년 4분기보다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추세를 유지해야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계서열 2위인 현대자동차그룹도 새해 들어 좋은 소식을 내놨다.
현대차는 앞으로 4년간 공장 신·증설 등 생산능력 확대와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건립, IT인프라 확충 등 시설투자에 49조1천억원, 연구개발(R&D)에 31조6천억원 등 총 80조7천억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지난 6일 밝혔다. 연평균 20조2천억원에 달하는 투자액으로 이는 이전 최대 투자액이었던 2014년 14조9천억원보다 35% 이상 늘어난 금액이다.
현대차로선 한전부지 인수를 둘러싼 불필요한 논란을 잠재우고 기업투자 확대를 주문하고 있는 국가시책에 부응할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최근 기업의 사내유보금에 과세하는 기업소득환류세제 시행령을 확정하는 등 투자하지 않고 있는 기업에 대한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다.
특히 4년 기간 중 올해에 가장 많은 투자액이 집중된다. 현대차그룹이 신규투자의 76%를 국내에 집중시킨 것도 고무적이다.
여기에는 정 회장 특유의 역발상 경영철학이 작용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투자를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정 회장은 과거에도 주요 경영의 고비 때마다 업계의 허를 찌르는 수를 내놓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은 바 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기아차를 인수할 때나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에서 ‘어슈어런스 프로그램’(구매 후 1년 내 실직하면 차를 되사주는 프로그램)을 도입한 것도 이런 역발상 경영의 하나로 평가된다.
이번 대규모 투자계획을 놓고 현대차의 경영기조가 바뀐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그간 불확실한 글로벌 경기전망 속에서 장기적 안목으로 품질과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며 내실을 다지는 경영방침을 이어왔으나, 글로벌 판매 800만대를 넘어선 올해부터 이런 경영기조의 변화가 예상된다는 것. ‘1천만대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확대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는 해석이다.
정 회장은 신년사에서 “현대자동차 그룹의 미래 경쟁력은 우리가 혁신적인 기술과 제품개발 능력을 얼마나 확보하고 창의적인 인재를 어떻게 육성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며 포부를 밝혔다.
현대차의 통큰 행보는 올해 투자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채 미적대고 있는 대부분 기업들에게 자극제가 되고 있다.
두산·대우건설·현대그룹 “위기가 기회”
박용만 두산 회장이 다른 총수들과 달리 세계 경제가 점진적 회복기에 들어섰다고 진단하며 ‘이제 행동하고 움직일 때가 됐다’고 임직원들에게 신속한 실행을 주문한 것도 눈에 띈다.
그는 신년사에서 “앞에 놓인 파이에서 큰 조각을 확보하는 한편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 신시장에서 사업 기회를 찾아야 한다”며 글로벌투자를 확대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신년사에서 “변화와 위기의 이면에 기회요인을 지렛대 삼아 능동적으로 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극심한 불황을 겪었던 건설·철강업계도 작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건설·철강업은 지난해 세계 건설시장의 극심한 불황 속에 수주량이 격감한데다, 그동안 실적을 견인해온 플랜트사업도 크게 줄었다. 여기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힘겨운 수주 경쟁을 벌이는 등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이런 가운데 대우건설이 새해에 던진 화두는 건설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대우건설은 올해 아파트 1만7334가구와 주상복합 1만99가구, 오피스텔 4147실 등 총 3만1580가구의 주거상품을 전국 각지에 공급하기로 했다고 지난 8일 밝혔다. 이는 연간 기준으로는 국내 건설사 사상 최대 규모다.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신규 주택공급이 부족했던 수도권과 지방에 역대 최대 물량을 공급한다는 공격적인 전략이다.
동국제강은 지난 2일 계열사인 유니온스틸과의 합병을 마무리하고 연산 1천만t 이상의 철강 생산 능력을 갖춘 철강회사로 새 출발했다. 동국제강은 새로운 통합 법인 출범에 맞춰 사내 공모를 통해 정한 ‘철에 철을 물들이다’는 올해 슬로건을 공개했다.
이는 쇳물을 생산하는 동국제강의 기본 철(鐵)에 컬러강판 등을 생산하는 유니온스틸의 아름다운 철(鐵)을 더한다는 뜻으로, 폭넓은 제품 포트폴리오를 갖추겠다는 의지다.
동국제강은 유니온스틸과의 합병으로 자산 규모가 7조2천억원에서 8조5천억원으로 늘어났다. 연 매출액이 4조원대에서 5조원대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침체된 철강업계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 기업들은 우울한 새해 전망을 내놓으며 긴축경영을 주문하고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은 신년사에서 “올해는 더 내실 경영에 힘써 달라”고 당부하며 “단순히 외형 성장이나 단기적 수익을 좇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허창수 GS 회장은 새해 시무식 때 ‘한 가지 이로운 일을 더 하는 것은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다’(興一利不若除一害·흥일리불약제일해)는 고사성어를 인용해 “불필요한 일은 과감히 줄일 것”을 당부했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새해도 경영환경이 호전될 기미가 거의 없다고 진단했다. 올해 세계경제 성장률은 미국의 회복에 힘입어 작년보다 소폭 나아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내수 부진과 중국의 성장 둔화, 엔화 대비 원화 가치의 상대적 강세 등으로 우리 경제의 돌파구 찾기는 녹록지 않다는 것.
권 회장은 철강 사업에 대해 “글로벌 수요가 제자리걸음을 하는 가운데 가격하락이 지속돼 마진 스퀴즈(수익성 압박) 상황이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현대중공업은 아예 올해 매출 목표액을 지난해보다 10%가량 낮게 잡았다. 현대중공업의 올해 사업 목표액은 24조3259억원으로 작년 초에 제시한 2014년 경영 목표 26조5700억원 보다 대폭 낮췄다.
총수 부재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SK그룹의 위기감은 더 크다. 김창근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신년사에서 “그룹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에너지·화학 분야가 급격한 환경변화로 생존조건 확보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몰려있다”고 위기감을 토로했다.
새해 첫날 SK이노베이션의 사령탑을 맡은 정철길 사장도 취임사에서 “우리는 겨울 폭풍과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며 생존조건 확보를 위한 사업구조·수익구조·재무구조 혁신과제를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완수해줄 것을 주문했다.
재계 한 고위관계자는 “경기지표 개선 흐름이 미약하고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져 올해 경제상황을 낙관할순 없지만, 삼성과 현대차 등 경기를 주도하는 기업들이 투자에 나선 것은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다”며 “위기돌파는 기업의 역량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만큼, 정부는 (기업들의) ‘손톱 밑 가시’를 뽑아주는데 더 속도를 내야 한다”고 바랬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