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발 저가 공세,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의 반격, ‘땅콩회항’으로 인한 반(反)재벌정서의 확산, 사내유보금에 과세하는 기업소득환류세제 시행 등 악재가 산더미다. 우울한 새해를 맞게 된 재계를 집중 조명했다. (CNB=도기천 기자)
대기업 절반 내년 ‘긴축경영’ 돌입
'땅콩회항' 불똥…투자·사업재편 부담
마케팅 10~20%삭감…구조조정 박차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 팔고 줄이고 허리띠를 더 졸라매는 수밖에 없다”
얼마전 1조원대 어닝쇼크를 낸 어느 대기업 관계자의 말이다. 그나마 지난해와 비슷한 실적을 유지했던 기업들도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삼성그룹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들은 내년 사업전망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허리띠 졸라매기’를 새해의 주된 경영기조로 삼았다. 이들 기업이 내다본 내년 경제성장률은 기관 전망치보다 한참 낮은 3.3%에 불과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최근 228개사(대기업 70곳, 중소기업 158곳)의 최고경영자(CEO)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기업은 절반 이상(51.4%)이 내년에 '긴축경영'(51.4%)을 하겠다고 답했다. 이는 작년(39.6%)보다 크게 늘어난 수치다. 확대경영을 택한 곳은 대기업은 14.3%, 중소기업은 21.9%밖에 되지 않았다.
긴축경영을 밝힌 기업들은 전사적 원가절감(43.4%), 인력부문 경영합리화(26.5%), 유동성 확보(12.0%), 신규투자 축소(9.6%), 자산매각(4.8%) 등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현 경기상황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현 상황을 ‘장기형 불황’으로 평가한 기업은 66.7%로 작년(43.5%)보다 크게 늘어났다.
이들 기업이 전망한 내년 경제성장률은 평균 3.3%로 주요 기관들의 전망 수준인 3%대 후반에도 못미쳤다. 한국은행은 내년 경제성장률을 3.9%로, 세계경제협력기구(OECD)는 3.8%로 예상하고 있다.
경총 관계자는 “경기지표 개선 흐름이 미약하고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져 내년 경제상황을 낙관할 수 없다”고 전했다. 대기업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 “기업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그룹들이 사업비, 마케팅비용 등 각종 투자예산을 10~20%가량 삭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울한 전망’의 기저에는 올해 잇따른 대기업 실적 악화가 자리잡고 있다.
최근 발표된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4조600억원에 그쳤다. 이는 올해 2분기(7조1천900억원)보다 43.5%, 작년 같은 분기(10조1천600억원)보다 60.05%나 감소한 것이다.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이 5조원을 밑돈 것은 2011년 4분기(4조6천700억원) 이후 약3년 만이다. 스마트폰 사업을 맡아 최근 3년간 실적을 이끌어온 IT모바일(IM) 부문의 영업이익이 크게 떨어진 것이 직격탄이 됐다.
현대차는 3분기 영업이익이 환율하락과 파업 등의 여파로 작년 3분기(2조101억원)보다 18.0% 감소한 1조6487억원으로 곤두박질 쳤다. 2010년 4분기(1조2천370억원) 이후 15분기 만에 최저치다. 영업이익률 역시 작년 동기 9.7%에서 7.7%로 뚝 떨어졌다.
해외 생산 비중이 44%에 불과해 환율 변동에 더 취약한 기아자동차는 영업이익이 현대차에 비해 더 큰 폭인 18.6%나 감소, 2년 만에 최저치인 5600억원대로 추락했다.
삼성과 현대차그룹의 매출이 국내총생산(GDP)의 35% 수준에 이를 정도로 막대한 상황에서 두 기업의 실적 부진은 국내 산업경제 전반에 큰 파급효과를 미치고 있다.
한국은행이 1700여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올해 상반기 매출액은 작년 같은 기간보다 0.7% 감소했다. 기업들의 매출액이 뒷걸음질 친 것은 세계금융위기 발생 직후인 2009년 이후 처음이다.
기업들의 수익성도 나빠져 올해 상반기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4.7%로 작년 상반기(5.1%)보다 0.4%포인트 하락했다.
더 큰 문제는 내년에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외적으로 저성장, 저물가 기조가 계속되고 있는데다 엔저, 원화강세 등의 여파로 주요 기업 상당수가 실적목표를 달성하기 버거울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른데다 애플 등 글로벌 경쟁업체들의 공세가 강화되고 있어 그동안 실적을 견인해 온 IM(IT모바일) 부분이 다시 활기를 띨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현대·기아차 역시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 업체와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다, 국내 시장에서는 수입차의 공세가 더 거세지고 있어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지난 3분기에 1조9천억원대의 영업손실을 낸 현대중공업은 최근 임원 30%를 줄였다. 포트폴리오 재편, 적자공사 수주 금지, 원가 절감 등을 골자로 한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올해 초 우이산호 충돌 기름 유출 사고에 이어 2분기에 정유업계 최대인 71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악재가 겹친 GS칼텍스도 비상이다. GS칼텍스는 그나마 형편이 나은 비정유사업간 시너지를 내기 위해 최근 석유화학사업본부와 윤활유사업본부를 통합하는 조직 개편을 하고, 임원을 15% 이상 감축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이 최근 경영에 복귀하면서 모처럼 활기를 띄고 있지만 글로벌 시장상황이 녹록치 않다.
한화는 그룹 역량을 총동원해 이라크 재건사업에 매달려 왔는데, 최근 추가 공사 수주가 답보 상태다. 한화건설은 2012년 우리나라 해외건설 역사상 최대 규모인 80억달러(9조원) 규모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공사를 수주했지만, 김 회장의 경영공백이 장기화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허리띠 더 졸라맨 대기업들
총수가 경제범죄로 구속 수감 중인 기업들은 어려움이 더 크다. 오너 부재로 인해 경영의사 결정이 지연되거나 신규사업 투자 부진, 실적악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면서 이들 기업은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최태원 SK회장은 다음 달이면 수감된 지 만 2년을 맞는다. 총수의 장기 부재로 SK그룹은 SK하이닉스를 제외하고 전계열사의 실적이 악화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비상경영 사령탑인 수펙스추구협의회의 기능을 확대해 기존 6개 위원회에 ICT위원회를 신설하는 등 다양한 회의체를 운영 중이지만 한계가 뚜렷하다.
CJ그룹도 이재현 회장의 공백이 길어지면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주요 투자계획 상당수가 지연되거나 중단됐다.
CJ그룹의 뿌리인 CJ제일제당은 바이오 사업부분의 실적악화 등으로 영업이익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CJ대한통운, CJ오쇼핑 역시 M&A 차질로 투자가 보류되면서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부의 사내유보금 과세,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일명 ‘땅콩 회항’으로 나빠진 재벌 정서 등도 대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정부는 지난 25일 기업의 사내유보금에 과세하는 기업소득환류세제 시행령을 확정했는데, 이에 따라 10대 그룹이 추가 부담해야 할 세금액은 1조800억원 수준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기업소득환류세란 앞으로 발생할 당기 이익 중 투자와 임금, 배당으로 쓰지 않은 금액의 일부를 세금으로 징수하는 것을 이른다. 이는 투자와 배당, 임금 등 더 많은 돈이 가계로 흐르도록 하자는 취지지만 기업에 대한 압박이라는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들어 반(反)재벌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땅콩 회항’ 사건 이후 재벌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이 확산되면서 경영권 승계 문제를 안고 있는 상당수 기업들의 분위기가 크게 위축돼 있다.
재계는 이번 사건의 여파가 자칫 경제민주화나 재벌개혁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을지, 오너 자제들에 대한 경영권 승계 움직임에 제동이 걸리지 않을지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오락가락하는 정부정책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대기업의 한 임원은 “정부가 올해를 규제개혁의 원년으로 삼고 ‘손톱 밑 가시’를 뽑겠다고 선언해놓고 ‘기업소득환류세’ 등 규제 성격의 제도를 도입한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며 “대부분 기업들이 투자를 유보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장상황이 좋지 않게 때문인데, 마치 곳간에 돈을 쌓아 놓고 풀지 않는 것처럼 비유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경총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기업들의 대부분(85.8%)이 신규투자 확대를 위해 진입 규제장벽을 낮춰 달라고 주문했다. 지주회사 규제(28.6%), 계열사간 거래 규제(22.9%),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20.0%), 모호한 배임죄 적용(11.4%) 등이 개선이 필요한 규제로 열거됐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지금같은 상황에서 대기업을 매도하고 규제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재벌의 공(功)은 인정하고 과(過)는 개선토록 유도해야 한다”며 “새해에는 정부와 기업, 국민이 대승적인 자세로 함께 지혜를 모아 눈앞에 산적한 대내외 악재들을 헤쳐 나갔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