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전 부사장 개인에게 집중됐던 따가운 시선이 대한항공을 넘어 재벌 기업들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몰라 숨을 죽이고 있다. 경기마저 얼어붙고 있어 대기업들에게는 어느 때보다 추운 겨울이 되고 있다. (CNB=도기천 기자)
‘회장님 재판中’ SK·CJ·효성…여론 ‘촉각’
연말연시 대규모 그룹 행사 대부분 취소
사면․경영승계 ‘눈총’…경제살리기 ‘찬물’
우선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있는 기업은 SK, CJ, 효성 등이다.
SK그룹 최태원 회장과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은 계열사 자금 450억원을 빼돌려 선물·옵션에 투자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각각 징역 4년과 징역 3년6월을 확정받아 복역 중이다.
최 회장 등이 유죄 선고를 받을 당시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은 ‘유전무죄·무전유죄’ 관행을 바로잡겠다며 기업인 등 사회지도층의 가석방을 원칙적으로 배제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황교안 법무장관과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잇단 ‘기업인 선처’ 발언으로 분위기는 급반전 됐다.
황 장관은 지난 9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경제에 국민적 관심이 많으니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기업인 사면․가석방을) 차단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며 기업인 사면 가능성을 시사했다.
다음날 최 부총리는 “기업인이라고 지나치게 엄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은 ‘경제살리기’에 도움이 안 된다”며 황 장관을 거들고 나섰다.
‘초이노믹스’로 한창 주가가 오르던 경제정책의 수장인 최 부총리의 당시 발언을 놓고 ‘박심(朴心)’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기업에 대한 강경정책을 고수했던 박 대통령이 최 부총리 등을 통해 여론을 살핀 뒤 정책을 수정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재계 안팎에서는 SK가 정․관계를 상대로 최 회장 등에 대한 선처를 호소해온 게 효력을 발휘 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모처럼 재계에 온기가 돌았다.
SK측은 지난해 1월 법정구속된 최 회장의 만기출소 시점은 2017년 초이지만 ‘형기의 3분의 1’을 채워야 한다는 가석방 요건을 충족했고, 재벌 총수로서는 역대 최장기로 복역했다는 점에서 성탄절 특사나 설 특사 또는 가석방에 희망을 걸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SK의 기대감은 높아졌고, 전 계열사에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엄명이 떨어졌다.
그런데 이 시점에 조 전 부사장 사건이 터졌다. 정치권은 “재벌가 오너의 갑질 사례 중 대표적 해악”이라고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SNS상에서는 오너 일가의 일감몰아주기, 경영권 승계, 제왕적 지배구조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CJ그룹도 달라진 여론 향배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구속 수감 중인 이재현 CJ 회장은 지난해 8월 만성신부전증이 악화돼 부인으로부터 신장이식수술을 받은 뒤 대부분 수감생활을 병원에서 보낼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지난 8월에는 이 회장의 건강 상태를 보다 못한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이건희 삼성 회장의 부인), 이인회 한솔그룹 고문 등 범삼성가 여인들(이 회장의 고모․숙모)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 회장을 선처해 달라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황 장관 등의 사면가능성 시사 발언은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었다.
총수에 대한 관대한 판결을 기대해온 CJ그룹은 이후 달라진 여론 흐름에 귀를 바짝 세우고 있다.
CJ 관계자는 “(이재현 회장의) 대법원 판결 앞두고 대한항공 사건이 좋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내부적으로 고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8천억원 규모의 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측도 ‘땅콩회항’ 사건이 재판에 영향을 미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조 회장은 고령(79세)인데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 중이다. 효성의 재무 및 기획 담당 임원들이 줄줄이 소환돼 막판 증인 심문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증인들은 당초 검찰 조사 때와 달리 분식회계와 조세포탈 혐의에 대해 조 회장 등 오너 일가의 지시가 없었다고 말을 바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대로라면 조 회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판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지만 대한항공 사태로 악화된 여론 앞에서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최근 현업복귀를 선언하고 한화건설의 이라크 비스마야 신도시 건설현장을 방문한 것을 두고도 말이 많다.
건강악화를 이유로 재판 내내 병원에서 생활하고 구급차로 법정을 오가던 김 회장은 지난 2월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항공기 회항 사건이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시기에 터지자 한화 측은 행여나 불똥이 튈라 몸을 낮추고 있다.
건강문제로 휠체어에 의지해 법정을 오가고 있는 이재현 회장과 조석래 회장 측도 김승연 회장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부담이다. 김 회장의 ‘건강 회복’을 두고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면서 상대적으로 ‘병세 악화’를 내세우기가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경영승계와 사업재편을 추진 중인 기업들도 여론을 살피고 있다.
한진그룹은 조양호 회장을 중심으로 장녀인 조현아 전 부사장과 장남인 조원태 대항항공 부사장, 차녀인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후계구도의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땅콩 회항’ 파문으로 그룹의 승계 구도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과 안정적인 경영승계라는 ‘두 마리 토끼 잡기’에 나선 삼성도 속도조절이 불가피하게 됐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하반기 제일모직을 중심으로 그룹 사업재편에 시동을 건 뒤, 올 들어 삼성SDS,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 삼성SDI, 삼성종합화학, 삼성석유화학 등 핵심계열사들이 줄줄이 합병·이전 등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최근에는 삼성SDS와 제일모직이 유가증권 시장에 성공적으로 상장됐다.
삼성SDS과 제일모직 주식을 상당부분 소유한 이재용 부회장은 단숨에 수조원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얻어 ‘세계 300대 부자’ 반열에 올랐다. 이 부회장은 의무보호예수 기간이 끝나는 내년 5~6월경 보유 주식을 일부 처분해 경영승계의 ‘실탄’으로 사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대한항공 사건으로 인해 이런 행보가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그룹 안팎에서는 “이번 참에 호흡조절을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배구조 개편에 나선 현대차그룹도 삼성과 마찬가지로 몸을 낮추고 있다. 정몽구 회장이 1938년생으로 고령인데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이 외아들이라는 점에서 정 부회장은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 받은 상태다.
현대차그룹의 지배 형태는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정 부회장이 그룹을 승계하려면 순환고리의 정점에 있는 현대모비스의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열쇠다.
증권가에서는 현대모비스를 지주사로 분할한 뒤, 현대모비스가 보유한 현대차 지분과 정 부회장이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지분의 맞교환 등 다양한 방안을 통해 정 부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배력을 넓혀갈 것으로 점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움직일 때가 아니다’는 분위기가 우세해졌다.
강경론 다시 고개드나
이처럼 재벌총수 일가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 정책이 다시 강경론으로 선회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박 대통령은 취임 초기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지분승계, 일감몰아주기 등에 대한 철저한 과세방침을 표방하는 한편 총수일가의 횡령·배임 등에 대한 엄정한 법집행을 강조했다.
이런 재벌규제 분위기는 지난 7월 내수경기 활성화를 내건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취임하면서 다소 완화되는 듯 했다.
이런 참에 터진 항공기 회항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되면서 대통령이 특별사면이나 가석방을 하기엔 부담스럽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재계 한 고위인사는 “예전 같으면 대기업들이 연말연시를 맞아 새해 청사진을 공개하는 대규모 행사를 앞다퉈 개최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몸을 사리고 있다. 이미 예정된 내년도 사업마저 차질을 빚을까 우려될 정도”라며 “오너경영체제가 신속한 사업 결정과 추진에 유리한 면도 분명 있는데, 나쁜 점만 부각되고 있어 곤혹스럽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