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과 땅주인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사이 겨울철 앙상해진 나무 사이로 입간판의 존재는 더욱 뚜렷해져 ‘안보불감증’이 도마에 올랐다. (CNB=도기천 기자)
14년전 사라진 ‘현대생명’…아직도 입간판 그대로
땅주인 “광고게재 할 생각없다…사유지 돌려달라”
군 “새 광고주 영입 못해…땅주인이 관리해야”
위장간판 뒤엔 방공포 기지…‘안보불감증’ 논란
CNB는 지난 4월 서울 시내 한복판의 야산에 주둔하고 있는 방공포대 기지의 위장막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 회사의 입간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관련기사: [단독]서울 야산 기업간판의 비밀…실제는 방공포 가림막)
문제의 입간판에 적힌 회사명은 ‘현대생명’이다. 야산 꼭대기에 주둔하고 있는 방공포대를 가리기 위해 특수제작 된 것으로 보인다. 육안으로 보기에 크기가 가로 20미터, 세로 2~3미터 가량의 초대형 규모다. 이 입간판 옆에는 ‘한국타이어’ 가림막이 설치돼 있다.
입간판 뒤에는 방공포 관련 시설물로 보이는 건물 한 동이 있고, 이 건물 옥상에 대공포 등이 설치돼 있다. 주변은 초병 2~3명이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CNB 취재진은 현장을 확인했지만 국가안보상 주둔부대의 명칭, 장소 등은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현대생명의 전신은 1989년 설립된 한국생명보험(주)이다. 2000년 1월 현대그룹에 흡수됐고, 그 직후 조선생명보험(주)을 흡수합병한 현대그룹은 두 회사를 합쳐 현대생명보험(주)을 세웠다. 현재 군부대를 감싸고 있는 ‘현대생명’ 입간판은 이때를 즈음해 탄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현대생명은 2001년 3월 금융당국으로부터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돼 영업정지 명령을 받았으며, 2001년 6월 대한생명보험(주)에 계약업무가 이전됐다. 이때부터 현대생명은 기업역사에서 사라진 것이다. 이후 대한생명은 한화그룹에 흡수돼 한화생명으로 간판을 바꿨다.
이미 오래전 없어진 회사의 입간판과 로고가 그대로 노출돼 있다 보니 의아해 하는 시민들의 제보가 잇따르고 있다. 특히 겨울철을 맞아 입간판을 가렸던 나무들이 앙상해지면서 간판 존재를 둘러싼 의문이 커지고 있다.
CNB의 최초보도가 나간 지난 4월 하순경, 군당국은 “위장간판을 활용해 광고를 하겠다는 기업이 나타나지 않아 그동안 그대로 놔뒀는데 최근 새로운 광고주가 나타나 5~6월경 광고판을 교체할 예정”이라고 알려왔다.
헌우회 특혜성 수익사업 논란
하지만 현재까지 문제의 입간판은 교체되지 않고 있다.
입간판이 오랜 세월 방치되고 있는 데는 군당국과 땅주인 사이의 갈등이 한 몫을 하고 있다.
현대생명 입간판이 위치한 자리는 국유지와 사유지가 섞여 있다. 입간판 자리의 20%가량은 한국방송예술교육진흥원(이하 진흥원) A이사의 개인 사유지다. 이 부지에 군당국은 방공포 위장용 광고입간판을 설치했다.
현대생명은 군당국에 부지 사용료(광고비)를 매달 납부해왔다. 하지만 현대생명이 공중분해 되면서 광고수익이 끊어졌고, 군은 진흥원 측과 입간판 사용을 협의했다.
군관계자는 CNB에 “위장간판이 오래전 사라진 회사의 홍보현수막이라 사령부에서도 하루빨리 교체해야 한다는 문제인식을 갖고 있다”며 “헌병전우중앙회(이하 헌우회)가 진흥원 측에 지속적으로 광고게재(입간판 내용 교체)를 요청하고 있다”고 밝혔다. 진흥원 외에는 비빌 언덕이 없다는 얘기다.
헌우회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산하단체다. 육군 헌병병과 출신 전역장병 및 군무원이 가입할 수 있다. 헌우회는 △회원복지 및 경조보조 △회원 자녀에 대한 장학지원 △헌우회지 발간 및 회원들을 위한 교양에 관한 사업 △각종 국가안보 행사에 적극 참여와 필요 시 지원 △불우한 회원 돕기 △6.25 전쟁 중 헌병장병 다수 희생지에 위령탑 건립 및 부대 위문 등을 주요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특히 사업추진에 필요한 재원조달을 위해 수익사업을 할 수 있도록 회칙에 명시돼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상조사업 전문기업인 한강라이프와 업무협약을 맺고 헌우회 회원들의 경조사를 챙기고 있다. 이런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군부대 가림막 등을 활용한 광고유치 사업을 지난 수십년간 진행해 왔다.
구멍난 방공망…주민들 불안
앞뒤 상황을 종합해보면, 현재로서는 위장 입간판이 교체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떡 줄 사람(진흥원)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군당국은 진흥원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입간판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이미 CNB가 지난 4월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어 더 그렇다.
인근의 한 주민은 “북한의 잇단 무인정찰기 남파로 불안감이 커지고 있는데, 방공망이 구멍난 것 같아 불안하다”며 “군이 빨리 조치를 취해 줬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간판 등 조형물 설치의 허가권자인 서울시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는 야산·공원 등 녹지대에 광고 입간판을 설치하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유독 군부대 시설물에 대해서는 관대한 입장이다. 시 관계자는 “위장간판이 중앙정부 소관인 군사시설물이라 관여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군 장성 출신의 한 인사는 “군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한다. 과거부터 군 유관단체에 특혜성 사업을 몰아줘왔던 관행이 이런 일을 초래한 점도 분명 있다”며 “다양한 광고사업 수완을 발휘하는 민간업체에 일을 맡겼다면 이렇게까지 광고판(위장입간판)이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