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인사로는 첫번째 케이스로 ‘경관 모욕죄’ 적용 대상에 올랐다는 점에서 세간의 관심을 모았지만 유야무야(有耶無耶) 사건이 끝나면서, 모욕죄로 피소된 평범한 시민들의 공분이 커지고 있다. (CNB=도기천 기자)
“내가 왕이다” 회장님 추태…‘모욕죄’ 변죽만 울려
징계하겠다던 대한체육회, 소리소문 없이 사건 덮어
유전무죄 무전유죄? 모욕죄 기소된 시민들 ‘공분’
인천 중부경찰서 등에 따르면, 남 회장은 인천 아시안게임이 한창이던 지난 9월 21일 오후 7시경 유도 경기가 열린 중구 도원체육관 VIP‧선수 전용 출입구에서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소속 보안요원과 경찰 등 여러 명에게 폭언과 욕설을 퍼부었다.
당시 남 회장은 일행 5명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3명은 경기장 출입증이 없는 상태였다. 보안요원과 경찰이 남 회장 일행의 출입을 막아서자 남 회장은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거세게 항의했다.
현장에 있었던 A경장은 “(남 회장에게) ‘회장님이 오히려 모범을 보이셔야 한다’며 수차례 설득했지만 (남 회장은) ‘건방진 놈’이라면서 개OO야. Ⅹ발 등 4~5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고 당시 상황을 CNB에 전했다.
남 회장은 “여기서는 내가 왕이다. 내가 경기를 중단시킬 수 있다”며 소란을 피웠다. A경장 외에 2명의 경찰관이 남 회장으로부터 이같은 봉변을 당했다. 이날 소란은 현장에 있던 유도회 관계자들이 남 회장을 만류하면서 수습됐다.
하지만 A경장은 남 회장을 현장체포하지는 않았다. 경찰청은 공무집행 중인 경찰관을 조롱하거나 비하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자, 최근 전국의 경찰관들에게 모욕죄를 적극 적용할 것을 지시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은 경찰관에 대한 언어폭력 등이 발생할 경우 현장체포 등 강경 대응하고 있다.
당시 A경장은 “극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국가적인 축제가 진행되고 있는 때라 나라 망신이 될까봐 마음을 다스렸다. 조만간 (남 회장을) 정식 형사고발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중부경찰서도 A경장을 비롯, 당시 상황을 목격한 경찰관, 대회조직위 관계자, 보안요원들의 자필 진술서를 받는 등 증인을 확보했다.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남 회장을 향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대한체육회, 피해자 조사 없이 사건 마무리
하지만 1일 CNB가 A경장에게 다시 확인해보니 사건이 발생한지 2개월이 넘은 지금까지 남 회장은 고발되지 않았다.
A경장은 이날 CNB와 통화에서 “남 회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정중하게 사과했다”며 “자세한 사과 내용은 그 분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밝힐 수 없지만, (남 회장이) 당시 상황에 대해 충분히 시인하면서 사리판단을 잘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A경장은 “남 회장이 고령인 점 등을 고려해 일단 접어두기로 했으며, 현재로서는 고소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또 “대한체육회의 남 회장 징계 여부는 (입장을 정리하는데) 참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욕죄는 친고죄기 때문에 피해자가 6개월 내에 고소하지 않으면 사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남 회장은 자신이 소속된 대한체육회로부터도 아무런 징계를 받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사건 발생 직후 대한민국선수단은 대한체육회에 정식 조사를 의뢰했다. 선수단 규정에 따르면, 대한체육회 가맹경기단체와 시도체육회에 소속을 두고 있는 자가 대회 현장에서 선수단의 명예 또는 국가의 위신을 손상한 경우, 대회종료 후에 체육회에서 징계 심사를 요청할 수 있다.
대한체육회는 특별조사부에 사안을 배정했고, 조사부는 대한유도회로부터 경위서를 제출받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행사진행요원들을 상대로 수차례 면담을 진행했다.
체육회 특별조사부 관계자는 CNB에 “조사결과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사건 자체가 복잡한 것이 아니고 증인이 충분해 조사가 어렵지 않았으며, 대부분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것과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 A경장 등이 밝힌 남 회장의 폭언·욕설 등이 사실이었고 남 회장도 이를 시인했단 얘기다.
그럼에도 체육회는 사실상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체육회는 남 회장에게 ‘재발 방지’를 요청하는 문서를 보낸 뒤 사건을 종결했다.
특히 조사 과정에서 피해당사자인 A경장과는 전화 통화조차 하지 않았다. 체육회 관계자는 “사건 직후 (A경장에게) 수차례 전화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아 부득이 현장요원들만을 상대로 조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모욕죄는 모욕을 당한 피해자의 주관적인 심경이 사건의 경중(輕重) 여부를 가늠 짓는 범죄 임에도 피해자 조사 없이 종결된 것이다.
체육회가 남 회장 사건을 대충 덮은 배경에는 김정행 대한체육회 회장과의 오랜 친분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43년생인 김 회장과 한 살 차이 남 회장(44년생)은 유도계에서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김 회장은 70년대 대한유도대 전임강사로 체육지도자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국가대표 유도코치, 대한유도회 전무, 아시아유도연맹 부회장·회장, 국제유도연맹 집행위원 등으로 명성을 날렸다. 남 회장이 대한유도회 회장에 취임한 2013년까지 18년간 유도회 회장을 역임했다. 또 김 회장은 94년부터 용인대 총장을 겸임하고 있는데, 남 회장은 2011년 용인대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런 가운데 대한체육회 하급 경기단체인 대한유도회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통상 선수나 임원 등에 대한 징계절차는 대한체육회가 조사를 진행한 뒤, 당사자의 소속 단체(대한유도회)에 징계를 요청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그렇다고 반드시 상급기관의 요청이 있어야 징계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사안에 따라 체육회 차원의 개입 없이도 유도회 자체적으로 징계 절차를 밟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도회가 자신들의 수장이자 유도계 원로인 남 회장을 먼저 조사하기는 상당한 부담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CNB가 사건이 알려진 지난 10월 초순부터 약2개월 간 유도회 입장을 듣기 위해 수시로 취재를 요청했지만 속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한편에서는 이번 일이 일반 시민들에 적용되고 있는 모욕죄 기준과 대비돼 법령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려던 한 여성은 이를 막아서는 경찰에게 “경찰이 삼성에서 돈 받았냐”고 내뱉었다가 모욕죄로 고소됐지만 이달 초 법원으로부터 무죄판결을 받았다. 지난 8월 수원의 한 법무사는 경찰관으로부터 모욕죄로 고소당하자 불법체포죄 등으로 맞고소해 논란을 빚었다.
이처럼 모욕죄 적용을 놓고 곳곳에서 마찰을 빚고 있는 가운데, 남 회장의 경우처럼 거물급 인사들에게는 제대로 법적용이 되지 않고 있어 형평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남 회장 사건의 경우, 경찰관 개인에 대한 모욕 차원을 넘어 국가적 망신을 초래한데다 대회 방해라는 명백한 범법 행위가 있는데도 모욕죄만 기준 삼은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더구나 모욕죄가 친고죄라 허무하게 사건이 끝나 버렸다”고 지적했다.
한편 남 회장은 숙취해소 음료 ‘여명808’을 만드는 (주)그래미의 실질적인 오너(대표이사 회장)이기도 하다. 2000년 장영실 국제과학문화상 대상, 2001년 새천년으뜸상 대상, 2008년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등 체육계와 재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CNB는 당사자인 남 회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그래미 홍보실에 취재를 요청했지만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