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사태를 계기로 주주권 행사를 요구하는 안팎의 여론에 직면한 국민연금은 사실상 ‘정부 지분’이라 금융사들이 직면한 금피아·낙하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민연금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CNB=도기천 기자)
의결권 행사 늘었지만 ‘금융사 낙하산’엔 침묵
KB사태 사실상 방관…비난 커지며 ‘진퇴양난’
경제개혁연대, KB 상대 주주대표소송 내비춰
KB금융지주가 지난달 공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KB주식 9.96%(3848만여주)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KB 주식이 시장에서 주당 4만원(23일 종가기준) 선에 거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약1조5400억원 규모다.
주주권리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 측은 24일 CNB에 “수개월간 계속된 KB금융 사태가 회사 가치 하락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소액주주들과 외국인 주주들의 반발이 심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을 비롯, 주주들이 권한을 위임해 준다면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는 KB금융 등 금융회사들에 대한 주주활동 계획을 이달 말 내부회의에서 검토해 이행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전날 김상조 소장은 최수현 금융감독원장 초청 금감원 부서장 교육에서 KB금융의 차기 회장 선임과 관련, “주주이익을 침해하는 결정에 대해선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는 등 법이 보장한 모든 소액주주 권리의 행사 추진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 소장은 “주주활동이 결정되면 당장 KB금융 회장 선임을 위한 주총에 참석해 회장 후보가 2만5천여명의 거대조직을 운영할 수 있는 경영능력이 있는지 설명할 것을 요구할 것”이라며 “주주들이 반대하는 후보선임에 대해선 주주제안이나 대표소송도 내겠다”고 강조했다.
경제개혁연대의 이같은 움직임은 최근 발생한 KB사태가 금융권의 고질적인 병폐인 ‘낙하산 인사’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민병두 의원실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금융권 낙하산은 2010년부터 작년까지 모두 124명에 이른다. 금융지주 41명, 시중은행 45명, 손해보험 8명, 생명보험 9명, 증권회사 21명 등이다.
KB금융이 100%지분을 갖고 있는 국민은행은 1995년 국민은행법이 폐지되면서 일반상업은행으로 탈바꿈했고, 2003년 정부가 지분 9.1%를 모두 매각하면서 완전 민영화됐다.
하지만 2008년 지주회사로 전환한 이후 회장은 모두 외부 인사로 채워져 왔다.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행장과 지주회장은 정권 실세나 ‘모피아’(재무부+마피아)의 몫이라는 관행이 굳혀졌다.
최근 사임한 임영록 전 회장도 모피아 출신(행정고시 20회)이며, 전임 어윤대 전 회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고려대 동문이자 최측근이었다. 이번에 KB를 제재한 신제윤(24회) 금융위원장, 최수현(25회) 금융감독원장도 모피아 출신들이다.
금감원은 임 전 회장 등에 대한 징계의 구실로 은행 주 전산기를 유닉스로 전환하는 과정에서의 내부 잡음 등을 내세웠지만, 업계에서는 임 전 회장의 자리보전 욕심이 사태를 더 키운 것으로 보고 있다.
낙하산·모피아의 특성상 때가 되면 자리를 비껴줘야 하는데 임 전 회장이 이런 분위기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행장과 회장 간의 내홍에서 비롯된 KB사태는 임 전 회장 등에 대한 경징계→중징계→직무정지→이사회 해임결정으로 이어지면서 100일 넘게 KB의 경영공백을 초래했다. 1등을 달리던 국민은행의 실적은 올해 상반기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경제개혁연대를 비롯한 소액주주들은 이런 배경에서 국민연금에 강력한 주주권 행사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선뜻 주주들의 편에 설 지는 미지수다. 올해 초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 본부장은 KB금융지주를 비롯, 한국전력, 삼성전자, 현대차 등을 순회하면서 “재무적 투자자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당시 일부 언론은 “국민연금이 주주권(의결권) 행사에 손을 뗐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고 경제개혁연대는 발언의 진위와 관련, 국민연금에 공식해명을 요청했다.
이에 국민연금 측은 “투자자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것은 기업이 주주 가치에 반하거나 수익을 저해하는 의사결정을 했을 때 국민연금도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라면서 기존 입장과 달라진 게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지난해 연말 인사에서 새로 부임한 본부장이 취임과 동시에 주요기업들부터 내방했다는 점에서 곱지 않은 시선이 계속됐으며, 실제로 의결권 행사도 지난해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올들어 국민연금은 삼성그룹 주식을 크게 늘리면서도 계열사 간 인수·합병 등 대규모 사업재편에는 입을 다물었다. 최근에는 현대차그룹이 한전부지를 인수하면서 지나치게 높은 금액을 배팅해 주식가치를 하락시켰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제개혁연대를 비롯한 소액주주들의 국민연금에 대한 비난 목소리도 갈수록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KB금융 주주들이 국민연금을 압박하는 이유는 정부가 국민연금 지분을 내세워 낙하산 인사 등 외풍을 주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공시에 따르면, KB금융의 5%이상 주요주주는 국민연금(9.96%)과 The Bank of New York Mellon(8.37%)에 불과하다. KB계열사 임직원들이 보유하고 있는 우리사주조합의 지분은 0.72%에 불과하다. 나머지 80%이상을 개미주주들이 보유하고 있다. KB금융은 국민은행 지분 100%를 보유하고 국민은행은 그룹 전체 자산의 90%를 갖고 있어 한 조직이나 다름없다.
정부(보건복지부)가 국민연금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라 KB 회장과 국민은행장에 대한 인사권을 음으로양으로 행사할 수 있는 구조다.
더구나 국민연금은 KB지분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KB가 금융지주사로 전환된 2008년 당시 5.03%였던 지분은 2009년에 6%대로 올라섰고, 2012년 8%대, 지난해 9%대로 늘었다.
지분이 늘어난 만큼 목소리도 커져야 하는데 되레 침묵이 길어지고 있다. 이는 국민연금을 통해 금융사들을 통제하려는 정부 의도가 근저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는 지난 6월 ‘금융부문 낙하산 인사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의 토론회에서 “KB사태는 국민연금공단이 KB금융의 최대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정부가 지주회사 회장과 은행장 임명을 좌우해온 것이 발단이 됐다”며 “외부 인사들이 경영진을 독차지 하는데다 이마저 수시로 바뀌다보니 장기적인 경영전략 없이 내부적으로 갈등이 고조됐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대 강정민 연구원은 CNB와 통화에서 “KB금융에 대한 주주행동은 국민연금이 판단할 부분이지만 그동안 여러 차례 (주주권 행사) 요구에도 불과하고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며 국민연금의 소극적인 태도를 꼬집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24일 CNB에 “최대주주로서 (KB사태에 대해) 문제점을 인식하고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으나 재무적투자자로서 경영에 직접적인 관여는 어렵다”며 “기존에 마련돼 있는 의결권행사 지침(가이드라인)에 따라 향후 주총에서 중요 안건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주주제안이나 대표소송 등 주주행동에 대해서는 선을 긋겠지만, KB금융 회장을 선출하는 주총에서는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미 회장추천위원회(회추위)가 최종 후보를 정한 뒤 찬반의결만 행하는 주총이라 요식행위에 그칠 공산이 크다.
한편 KB회추위는 지난 19일 첫모임을 가진데 이어 향후 5~6회 가량 회의 및 후보자 면접을 거쳐 10월 말경 최종 후보를 추천한다. 새 회장 선출은 11월 중순경 열리는 임시주주총회에서 결정된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