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병합 직전인 1906~1908년 순천 구례 일대에서 의병 200여명을 조직 일본군과 숱한 무장투쟁을 벌이다 전사 순국한 전남 구례출신 장규하(張圭夏 ‧~1908.9.20) 의병장의 뚜렷한 행적이 순국 106년 만에 경남의 한 향토사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발굴됐다.
16일 경남 하동문화원 정재상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일제가 작성한 ‘진중일지’(토지주택박물관)와 ‘폭도에 관한 편책’(국가기록원)에서 장규하 선열의 활약상과 최후가 담긴 문건을 발굴, 정부에 서훈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정위원장이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장규하 의병장은 을사늑약(1905년) 이후 전남 순천지역을 중심으로 광양, 구례, 곡성과 전북의 남원 그리고 경남 하동, 산청에서 의병 200여명을 조직하여 일본군 정규군에 맞서 싸운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던 중 장규하 의진 90여명은 1908년 9월 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쳐 순천 한동 동방 구례에서 일본군 진주(晉州)수비구 사령부 소속의 구례대(求禮隊)와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장규하를 비롯한 의병36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관이 총상을 입기도 했다.
한편 자료를 발굴한 정재상 위원장은 “이번에 발굴된 자료는 장 의병장의 항일무장투쟁 활약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만큼 독립유공자로 인정될 중요한 근거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