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강모(45)씨는 농협은행이 자신을 채무자로 취급하는 바람에 10년 넘게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없었다. 농협 측은 뒤늦게 강씨와 합의했지만 이 과정이 금융당국에 제보돼 물의를 빚고 있다. 강씨의 기막힌 사연을 CNB가 단독 취재했다. (CNB=도기천 기자)
농협 잘못으로 피해 본 강씨, 되레 채무자 몰려
수년간 카드발급․대출 등 금융거래 막혀 ‘고통’
농협, 피해자와 합의했지만 여전법 위반 논란
국민권익위·금융당국, 사건 전말 전면조사 착수
강씨는 지난달 초 하나카드를 신청했다가 자신이 특수채권자로 분류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나은행 카드담당자는 강씨에게 농협은행 가락시장지점에 미납된 카드대금이 있어 신규카드 발급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왔다.
강씨는 농협카드를 발급받은 사실조차 없었다. 강씨가 가락시장지점에 항의하니 지점 측은 “카드대금 미수(미회수) 채권이 있어 2005년에 농협여신관리단으로 해당 채권을 넘겼다”고 확인해줬다.
강씨는 다시 농협여신관리단에 문의했고, 해당 건이 농협자산관리회사 강원도춘천지부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산관리회사 측은 “잘못 설정된 채권이 넘어온 것으로 확인돼 다시 농협중앙회로 돌려보냈다”고 강씨에게 밝혔다.
강씨가 해당 채권을 역추적해보니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17년전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들어 사용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발생한 카드대금이 지금까지 따라다녔던 것이다. 당시 사건은 사법당국이 신원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고 카드를 발급해준 농협 측의 잘못으로 판명내린 건이다.
경찰 “농협, 카드발급심사 소홀했다”
CNB가 단독 입수한 농협 내부자료와 강씨의 주장 등을 종합해보면, 강씨는 지난 1998년경 서울 송파경찰서와 부산 강서경찰서로부터 출두 통보를 받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명의로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했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결과, 피의자는 1997년경 강씨가 분실한 주민등록증을 이용해 농협은행 가락시장점으로부터 농협비씨카드를 발급받았다.
피의자는 유령회사(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해놓고 강씨를 비롯한 100여명을 회사직원으로 둔갑시켰다. 이들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가짜 신분증, 재직증명서, 근로소득원천징수영수증 등을 만들어 지점장 전결의 특별발급(특인) 형태로 신용카드(농협비씨카드) 수백장을 만들었다.
농협 측은 카드발급 당시 신청자(피의자)의 신원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강씨의 경우, 카드발급신청서에 첨부된 사진이 6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당시 강씨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었다. 주민등록증의 나이(20대)와 사진의 얼굴(60대)이 확연한 차이를 보였음에도 농협측은 아무런 의심없이 카드를 발급해준 것이다.
강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의 관련서류들이 전부 위조됐지만 은행 측은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 경찰은 전문사기단의 소행으로 파악, 은행 내부에 공모자가 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러자 농협 측은 카드발급심사 과정에 잘못이 있었음을 시인했고, 카드를 발급해준 담당직원 2명이 강씨 등에게 사과했다.
강씨는 카드발급심사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농협 측을 형사고소했다. 이후 카드 담당직원 2명이 당시 강씨의 사업장이 있던 부산에 내려와 잘못을 빌며 고소를 취하해 달라고 사정해 ‘신용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고소를 취하했다.
하지만 농협은 이때부터 강씨를 줄곧 채무자로 분류해왔다. 강씨 이름을 도용한 사기단이 사용한 카드대금 450만원을 강씨의 채무로 둔갑시킨 뒤, 강씨를 은행연합회와 신용정보회사에 신용불량자로 등재했다. 신용불량 기간 경과 후인 2007년부터는 특수채권자(카드대금 미납으로 카드발급 불능자)로 분류했다.
강씨는 자신이 특수채권자라는 사실을 최근까지 전혀 몰랐다. 본인 명의의 핸드폰 개통이나 신용카드 발급이 번번이 거절당했지만, 당시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강씨는 소득증빙 등이 제대로 안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동안 주로 현금카드(입출금카드)만 이용해왔던 강씨는 지난달 하나카드를 신청했다가 하나은행으로부터 특수채권자로 분류돼 있음을 통보받고 그제야 실상을 알게 됐다.
농협 관계자는 이와 관련 “강씨의 채권 정보는 농협 내부에서만 관리돼 온 것으로 외부(하나은행 등)에 제공되지 않았다”며 “오래전 일이라 관련 서류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기가 힘들지만 앞뒤 정황으로 볼 때 17년간 신용불량자로 취급된 것은 아니며 제한적인 기간만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농협이 강씨를 줄곧 채무자로 취급했던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농협 관계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당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강씨가 채무자로 분류된 과정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고 밝혔다.
강씨는 CNB 기자에게 “내가 왜 채무자가가 되었냐고 농협 측에 수십번 항의하자 (농협 측이) ‘연체기록을 삭제 하려했으나 오랜 세월이 기나 기록원본이 없어져 삭제를 못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농협이 지난달 4일 강씨에게 보낸 A4용지 4장 분량의 ‘채권정보’에 따르면, 강씨 사건에 대한 농협의 판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문건에 명기된 농협 여신관리팀의 2006년 3월6일자 기록에는 “(강씨 채무건에 대한) 서류파악 결과 본건은 주민등록증, 직장서류 등을 위조하여 조직적으로 카드를 부정발급 받은 건으로 파악됨. (강씨가) 주민등록증을 분실하고 제3의 인물이 위조된 주민등록증을 갖고 지점을 내방, 카드 발급함. 당시 (여신관리단에) 이관을 시키지 말고 (농협)중앙회로 보내야 하는 건이었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농협 측은 강씨의 채무가 아니라고 판단, 그동안 강씨에게 단 한 차례도 카드대금연체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납부독촉을 하지 않았다.
강씨의 채무는 아니었지만 강씨의 명의를 도용했던 피의자가 해당 카드빚을 갚지 않았기 때문에 전산에는 그대로 채무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앞뒤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농협이 연체된 카드대금이 강씨의 채무가 아닌줄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바람에 강씨는 신용불량 단계를 거쳐 특수채권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농협 관계자는 “2007년부터 별도로 특수채권으로 분류한 것이 아니라 종전의 내부 원장(전산기록)이 계속 남아있었던 것”이라고 전했다.
뒤늦게 이같은 사실을 알게 된 강씨가 강력 항의하자, 농협카드 민원팀이 지난달 중순경 본격적인 사실조사에 나섰고 며칠 뒤 강씨와 합의했다.
농협 측은 강씨에게 “1997년도에 있었던 사건이라 자료 원본이 보관돼 있지 않아 자세한 과정을 알 수 없지만, 원본 외 다른 자료들을 취합해 볼때 잘못 취급한 채권”(강씨 녹취)이라고 시인했다.
하지만 합의 과정에서 농협 측이 여신전문금융업법을 위반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CNB가 입수한 강씨와 농협 간의 합의서에 따르면, “(강씨가 민원을 제기하기 않는다는 조건으로) 특수채권 기록을 삭제하고 신용카드 이용한도 조정 및 카드론 한도를 부여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는 신용·직불카드의 발급기준을 명시하고 있는 여신전문금융업법 제14조 등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
이 법에서는 “신용카드 한도액이 신용카드업자가 정하는 신용한도 산정 기준에 따른 개인신용한도를 넘지 아니할 것”(제14조2항)을 규정하고 있다. 강씨의 현재 신용등급이 8등급이라 카드발급이 힘든 상태라는 점에서 농협 측이 무리수를 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같은 농협과 강씨 간 합의내용을 알게 된 강씨의 지인 A씨가 지난달 21일 금융당국에 ‘공익제보’를 했고 이달초 국민권익위원회가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A씨는 5일 CNB기자에게 “20년 가까이 멀쩡한 사람을 신불자로 만들어 놓고 이에 합당한 사과·보상은 없고 피해자(강씨)의 경제적 약점을 이용해 대출을 미끼로 현혹한 농협의 행태에 분노를 느껴 제보하게 됐다”며 “권익위 조사관이 ‘사안이 심각한 것 같다’며 녹취 등 관련자료 일체의 제출을 요구한 상태”라고 전했다.
농협 측은 “민원인의 신용등급은 8등급보다 높은 상태며, 카드발급 및 한도부여가 여전법 위반사항은 아니다”고 밝혔다.
대출을 미끼로 회유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강씨가 먼저 카드발급 등을 요청해서 민원담당자가 이를 수용해 반영한 것이며, 민원인(강씨)과의 협의과정에서 수차례 사과를 드렸고 현재는 원만히 합의한 상태“라고 전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