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모 지점(왼쪽), 삼성전자 본사 외경. (사진=연합뉴스)
국민연금이 최근 삼성그룹 계열사 지분을 늘리면서 그 배경을 두고 설왕설래가 오가고 있다. 단순 투자로 보기에는 지분율 확장이 심상치 않다는 것.
정부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건희 회장의 투병, 삼성그룹의 사업재편 등 복잡한 변수들 사이에서 경영권 행사에 나설지도 관심사다. (CNB=도기천 기자)
국민연금, 지분5%이상 삼성계열사 13곳
“단순 투자 차원일 뿐” 확대해석 경계
재계 “수익률·기업감시 둘 다 노릴 것”
1일 현재 국민연금공단의 삼성그룹 계열사 주식평가액은 20조6300억원에 이른다. 국민연금이 국내 500대 기업 주식에 투자한 68조원 중 30.6%에 달하는 수치다. 평가금액이나 비중 면에서 삼성이 독보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개별기업으로는 삼성전자의 국민연금 투자 평가액이 전체 기업들 중 가장 높다. 국민연금은 삼성전자 주식 7.7%를 보유해 평가액이 15조3700억원에 달한다.
국민연금은 삼성그룹 16개 상장사 중 삼성생명과 삼성카드를 제외한 14개 계열사의 지분 5% 이상씩을 갖고 있다. 10%가 넘는 곳이 삼성물산(13.3%), 제일기획(10.2%), 호텔신라(10%), 삼성SDI(10.44%) 등 4곳이나 된다. 삼성증권과 삼성엔지니어링 지분율도 7%를 넘는다.
특히 국민연금이 최근 제일모직을 합병한 삼성SDI의 2대 주주로 등극해 화제다. 그동안 삼성SDI 지분을 꾸준히 늘려온 데다 합병에 따른 주식교환으로 주식수가 증가해 지난달 삼성전자(19.58%)에 이어 2대 주주(10.44%)가 됐다.
제일모직을 흡수통합한 삼성SDI는 지난달 1일 통합법인을 출범시켰다. 두 회사가 합쳐져 자산 15조5434억원의 거대 기업이 됐으며, 시가총액이 11조원을 훌쩍 넘어 유가증권시장에서 20위로 올라섰다.
국민연금 “삼성 투자가 가장 안정적”
국민연금이 이처럼 삼성 지분을 늘리고 있는 까닭은 뭘까?
국민연금 측은 ‘단순 투자 차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국민연금의 운용 목적 자체가 국민기금으로서의 수익률 증대인 만큼 안정적인 대형주에 투자하고 있으며, 삼성 계열사들도 그런 차원에서 꾸준히 투자가 이뤄져 온 것”이라고 말했다. 주주권 행사 가능성에 대해서는 손사래를 쳤다.
삼성그룹은 올들어 대대적인 사업재편을 진행하고 있다. 삼성SDS,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 삼성SDI, 삼성종합화학, 삼성석유화학 등 핵심계열사들이 채1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줄줄이 합병·이전 등 사업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다음 차례는 건설·금융 부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후계구도의 윤곽도 한층 뚜렷해지고 있다.
우선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은 지난해 연말 제일모직의 패션사업부문을 삼성에버랜드로 이전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된다.
제일모직은 패션사업부문을 1조500억원에 삼성에버랜드에 매각한 바 있다. 1954년 원단 제조 등 모직물 사업으로 출발한 제일모직이 창립 59년 만에 모태사업을 통째로 넘긴 것이기 때문에 시장의 관심이 집중됐었다.
또 지주회사격인 삼성에버랜드를 내년 1분기에 상장하겠다는 계획을 지난 6월 발표했다. 앞서 4월에는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이 합병했으며, 5월에는 삼성SDS의 연내 상장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제일모직 패션 부문을 인수한 삼성에버랜드는 지난달 4일 회사 이름을 제일모직으로 바꿨다.
삼성전자 경영진이 최근 삼성반도체 피해노동자 보상 해결에 나서고,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노사의 단체협약 협상을 타결짓는 등 얽힌 난제들을 풀어 낸 것도 일련의 혁신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삼성전자가 어닝쇼크 수준의 2분기 성적표를 내놓긴 했으나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고, 삼성이 이에 대비해 ‘미래먹거리’를 향한 사업재편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시장에 주는 충격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국민연금이 삼성 계열사 지분을 꾸준히 늘리고 있는 것도 삼성의 혁신에 후한 점수를 줬기 때문으로 보인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재무적투자자의 입장에서 볼 때 삼성이 가장 안정적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위한 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최근 국민연금 등의 공익적 행동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수틀리면 ‘주주권 행사’ 가능성
일각에서는 최근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점을 들어, 삼성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 행사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현재로서 경영권 행사에 나설 가능성은 낮지만, 삼성 계열사들의 수익 악화나 경영권 승계 리스크 등이 발생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국민연금이 정부가 주도하는 연기금이라는 점에서, 삼성이 경영승계 등에 있어 정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나온다.
국민연금은 올들어 주주권 행사 과정을 손보는 등 기업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지난 2월 개정된 ‘의결권 행사지침’에 따르면, 의결 과정이 기금운용본부와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로 이원화 됐다. 이에 따라 기존에 기금운용본부에서 도맡았던 찬성·반대 판단을 경우에 따라 전문위원회로 넘기고 있다.
국민연금은 지난 3월 만도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재선임에 대해 개정된 기준을 처음으로 적용, 반대 의견을 내기도 했다.
국민연금의 반대 의견 비중은 2006년 3.73%에서 2007년 4.98%, 2008년 5.40%, 2009년 6.59%, 2010년 8.08%, 2011년 7.03%로 뚜렷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주총 때 국민연금이 의결권을 행사한 안건(2423건) 중 반대 의사를 나타낸 것은 270건으로 전체의 11.77%였다.
올들어 증가세는 더 두드러졌다. 올 1∼2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내용을 보면, 65개 안건 가운데 반대 입장을 밝힌 것은 11개로 16.92%까지 올랐다.
재계는 국민연금 측이 강조하는 ‘수익률 증대’를 ‘주주권 행사’와 분리해서 설명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증권사 고위관계자는 “삼성의 가장 큰 투자자로서 삼성이 정부시책에 어긋나는 결정을 하거나 실적이 악화될 경우, 지분을 팔거나 (주총에서) 반대표를 행사할 수 있지 않겠냐”며 “국민연금이 2012년 기업들의 상법 개정 움직임에 반발해 반대표를 던진 비율이 17%에 달했던 사례에서 보듯, 수익증대 뿐 아니라 정부의 기업감시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게 국민연금 지분의 성격”이라고 지적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재는 국민연금의 삼성 내 역할이 거수기에 불과하지만, 삼성의 사업재편이 분할·합병·상장 등 워낙 빠르고 복잡한 만큼 국민연금도 신중히 수지타산을 따지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잡음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냐”며 “아마 내년 상반기 주총 시즌이 정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