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뚝섬에 110층의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를 건설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새부지를 찾고 있는 현대차그룹과 수년전부터 삼성역 일대에 대규모 ‘삼성타운’ 건설을 꿈꿔왔던 삼성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서울시는 용도변경의 조건으로 부지의 40%를 공공용지로 내놔라고 선방을 날린 상태다. CNB가 한전과 서울시, 기업들의 속내를 들여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한전 부지에 사활건 현대차, 인수전 참여 선언
신중했던 삼성, 태도 바꿔 매입 의사 드러내
서울시 “부지의 40% 기부채납 해야 용도변경”
한전, ‘부채감축’ 지상과제… 최고가 경쟁입찰
한국전력공사(한전) 본사 부지는 서울 강남 삼성역과 코엑스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강남 최대 상권과 인접해 있고 면적이 축구장 크기의 12배(7만9342㎡)에 달할 정도로 넓다.
한전은 오는 11월 전남 나주로 본사를 옮긴다. 나주 빛가람도시의 랜드마크로 건립될 한전 신사옥은 현재 내장 공사가 한창이다. 이에 따라 늦어도 내년 11월까지는 현재 사옥과 부지를 매각해야 한다. 혁신도시특별법은 공공기관이 혁신도시로 이전한 뒤 1년 이내에 사옥을 팔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전은 법이 정한 매각 시한 보다 앞당겨 올해 안에 매각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한전 측은 “공공기관 부채 감축목표를 조기에 달성하자는 정부 방침에 부응하고, 서울시 공공개발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조기매각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부지 매각이 속도를 내고 있다. 한전은 17일 이사회를 열고 매각 방안을 확정했다. 최대한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입찰 자격제한을 두지 않는 일반 경쟁입찰 방식을 채택했다. 입찰희망자는 개인과 법인, 공동입찰 등 어떤 형태로도 참가할 수 있다. 한전은 이달 중 감정평가를 끝내고 8월 말 매각 공고를 낼 계획이다.
현대차, ‘글로벌통합센터’ 숙원 풀릴까
부지 매입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은 현대차그룹이다. 현대차는 한전의 매각안이 나온 직후 “글로벌비즈니스센터 건설을 위해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돌입할 계획”이라며 인수전 참여를 공식 선언했다.
현대차는 전 계열사를 한데 모은 대규모 통합센터를 갖는 게 오랜 숙원이었다. 서울 양재동 본사는 공간이 협소한데다, 건물만 우뚝 솟은 오피스 빌딩 형태라 오래전부터 자동차 기업의 철학을 제대로 담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현대차 계열사는 30여개, 소속 임직원은 1만8000명에 달하지만 양재동 사옥의 수용 능력은 5000명 안팎에 불과해 주요 계열사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 외부 빌딩을 임차해 분산 입주해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현대차는 지난 2006년부터 서울 성수동 뚝섬 인근 옛 삼표레미콘 부지에 약2조원을 투자해 110층 높이의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를 짓고 그룹 소속 모든 계열사를 입주시킨다는 메머드급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하지만 각종 규제로 빌딩 건립이 지연됐으며, 마침내 서울시가 지난해 ‘초고층 건축관리 기준’을 마련, 50층·200m 이상 초고층빌딩은 도심과 부도심에만 지을 수 있도록 하면서 ‘꿈’을 접어야 했다. 서울시 규제안에 따르면 뚝섬은 초고층빌딩 건설 가능지역인 도심·부도심에 해당되지 않는다.
8년 가까이 공 들여온 뚝섬 프로젝트가 폐기되자 현대차는 자연스레 한전 부지로 눈길을 돌렸다.
계동의 현대차 영업본부, 압구정동의 기아차 영업본부, 현대모비스 등을 한데 합쳐야 하는 현대차로서는 한전 부지만한 규모를 찾기 힘들다. 강남의 교통요지인데다 특급호텔들과 코엑스가 인접한 점도 매력 포인트다.
현대차는 올해 초부터 양재동 본사에 태스크포스(TF)를 만들고 한전 용지 인수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진행해 왔다. 현대차는 독일 볼프스부르크에 위치한 폭스바겐의 본사(아우토슈타트)를 벤치마킹해 업무시설과 호텔, 컨벤션센터, 자동차테마파크, 문화이벤트 공간 등을 갖춘 대규모 글로벌 통합센터를 짓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신중한 입장을 보여왔던 삼성도 현대차의 인수전 선언 이후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18일 CNB에 “현대차처럼 인수전 참여를 선언할 시점은 아니다”면서도 “관심을 갖고 (한전부지 인수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까지 삼성은 “공식 입장이 없다”며 말을 아껴왔었다.
삼성그룹은 주력 계열사인 삼성생명을 앞세워 지난 2011년, 한전 부지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감정원 부지 1만988.5㎡(3324평)과 연면적 1만9564.1㎡(9518평)의 건물을 2328억원에 매입한 바 있다.
삼성이 이 땅을 매입할 당시 서울시는 한전 부지와 감정원 부지를 비롯, 서울 의료원과 강남소방서 부지 일부를 합쳐서 2호선 삼성역 일대에 대규모 컨벤션타운을 건설하는 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하면서 서울 전역의 대규모 개발사업이 전면 재검토에 들어갔고, 이에 따라 삼성도 서울시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었다.
한없이 보류될 뻔 했던 삼성의 계획은 서울시가 최근 한전 본사 부지를 포함해 코엑스∼잠실운동장 일대를 국제 업무·마이스(MICE, 회의·관광·컨벤션·전시회)·스포츠·문화엔터테인먼트 중심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삼성은 과거 삼성물산 등을 통해 삼성동 한전 부지 일대를 복합 상업시설로 개발하는 방안을 내놓았을 정도로 이 지역에 미련을 갖고 있다. 지하철 역명이 ‘삼성역’이란 점도 매력적이다.
지난해 5월 변준연 한국전력공사 부사장은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전 인근에 지하철 삼성역이 위치한 탓에 역명과 발음이 같은 삼성그룹이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한전부지와 감정원 부지 등을 합쳐 대규모 삼성타운을 건설할 것이라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며 “그동안 대기업에 특혜를 준다는 눈총을 받을까봐 신중했던 박원순 시장이 최근 개발추진 쪽으로 선회하면서 삼성이 한껏 고무된 모습”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삼성이 최근 한전 고위층과 접촉하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며 “공중전에 강한 삼성이 깜짝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도 있다”고 내다봤다.
삼성·현대 혈투에 가격 ‘쑥쑥’
삼성과 현대차의 정면 충돌이 예상되면서 부지 가격이 어느 정도 선에서 형성될 지도 관심사다. 한전 부지의 작년 말 공시지가는 1조4837억원, 장부가액은 2조73억원이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시세를 3조∼4조원대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번 입찰이 최고가를 써낸 측이 인수하는 방식이라 공시지가의 3∼4배까지 보는 견해도 있다. 6조원 가깝게 가격이 치솟을 수도 있다는 것. 부채 감축이 지상과제인 한전이 기준가를 최대한 높일 가능성이 큰 데다, 글로벌 기업인 삼성과 현대가 외나무다리 혈투를 벌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나치게 가격이 높아지지는 않을 거라는 관측도 있다.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내 초고층빌딩 계획이 표류하고 있는데다, 용산 국제업무지구 개발 사업이 좌초된 터라 기업들이 무리하게 가격을 써내진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부동산컨설팅 업체의 한 관계자는 “한전 부지 일대가 서울 강남의 마지막 노른자위 땅인 것은 맞지만, 용산, 상암 등 다른 곳에도 개발부지가 있는 만큼 무리수를 두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한전 부지의 상당 부분을 서울시에 기부채납 해야 하는 점도 기업들에겐 부담이다.
현재 한전 부지는 상업시설 개발이 불가능한 3종 주거지역으로 묶여 세울 수 있는 건물 높이가 5~6층으로 제한돼 있다. 서울시는 이를 상업용지로 바꿔주는 조건으로 부지 구매자로부터 부지의 40%를 기부채납 받아 공공용도로 쓸 계획이다. 이는 국토교통부가 지난해 ‘기반시설 기부채납 가이드라인’을 마련한데 따른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40%기부채납은) 한전 부지 뿐 아니라 용도 변경을 전제로 하는 각종 개발사업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라 변동 여지가 없다”며 “공공기반 시설을 최대한 늘리겠다는 게 시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한전 부지를 비롯한 삼성동 일대 개발은 최고가 입찰이라는 부담에다, 서울시의 용도변경을 통과해야 하는 등 넘어야할 산이 한두가지가 아니다”며 “서울시가 최근 안전대책 부족을 이유로 제2롯데월드 사용허가를 보류시킨데서 보듯, 공공성과 통합성을 강조하는 박원순 시장의 스타일로 볼 때 부지를 매입해 놓고도 개발 착수까지는 상당 시일이 걸릴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