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운동을 그만 둔 중·고등학교 학생선수의 인권상황 실태조사였다. 박사과정 시절인 2009년이다. 생애 첫 학생선수와 관련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설렘보단 긴장이 앞섰다.
부족함을 매우기 위해 난 하루의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보냈다. 24시간은 생각과 달리 짧기만 했다. 6시 영어학원을 시작으로 학교수업, 그리고 인권위 일을 하다보면 다시 영어학원에 가야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점점 연구실 간이침대와 친해졌고, 집과는 멀어졌다.
잠복근무를 서야하는 형사처럼 옷만 챙기기 위해 집에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 갓 돌 지난 첫째 아들과 힘든 씨름을 하고 있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열심히 연구를 하는 것이 아내에게 보답하는 지름길이라 굳게 믿었다. 사랑하는 내 반쪽은 이런 날 이해해 줬다.
별빛이 환하게 느껴질 무렵에야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면 우선 안방으로 직행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침대를 뒤로하고 맨바닥에 몇 장의 담요와 엉켜 자고 있는 아내와 아들이 보인다. 지친 아내와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의 해맑은 얼굴은 힘든 내 삶의 오아시스였다.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아내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루를 버텼다.
“인권위 프로젝트에 인권이 없고, 체육과인데 체육을 못해”라고 자위하며 프로젝트 연구원 생활을 한지 8개월이 됐다. 아주 오랜만에 낮에 집에 들어갔다. 그동안 잠에서 깰까 봐 숨죽이고 그저 지켜만 봐왔던 아들을 번쩍 안아 올렸다. 기쁨도 잠시, 아들이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를 안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이 잘 때 자주 봤지만 아들은 아니었나보다. 존재만으로도 삶의 활력소였던 아들의 반응은 내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바로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삶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알게 됐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반증이었다.
“중요한 일과 바쁜 일 중 무엇을 먼저 하겠니?” 지도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사람은 대부분 눈앞에 놓인 급한 일을 우선시한다. 하지만 앞에 놓인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반면 중요한 일이지만 바로 앞에 없다면 급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요즘 학생은 바쁘다. ‘중딩’은 고등학교에, ‘고딩’은 대학교에, ‘대딩’은 직장에 잘 가기위해 바쁘다. 각종 학원, 봉사활동, 학교성적까지 ‘만능’이 돼야 한다. 다들 더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가기 위해 ‘스펙(spec) 쌓기’에 혈안이다.
학점 4.0 이상, 토익 850점, 어학연수, 봉사활동, 자격증, 수상경력 등 남이 하기에 나도 해야만 안심이 되는 세상이다. 귀여운 중학생 딸을 둔 한 선배의 말이 생각났다. “요즘 중3 마치기 전에 고3 수업내용을 마스터해야 해.” 중3이 중3이 아니다.
‘Spec(스펙)’은 자동차나 전자제품의 설명서나 사양(仕樣)을 의미하는 명사 ‘Specification’의 줄임말이다. ‘스펙 쌓기’란 구체적인(specific) ‘자기 사용 설명서’를 작성하는 일이다. 스펙은 한 인간의 삶, 능력, 열정을 얼마나 잘 나타낼 수 있을까? 계산대로 움직이는 인간, 수치화 된 인간의 능력, 양(量)화 된 인간을 능력을 평가하는 세상, 생각만으로도 슬프다.
젊음은 패기다. 급한 것보다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게 ‘청춘(靑春)’이다. 긴 호흡으로 봤을 때, ‘바쁜 것을 하다 중요한 것을 놓친 경험’ 또한 중요하다. 중요한 일을 수행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 중요한 것과 아닌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교자채신(敎子採薪)! 무슨 일이든 장기적 안목을 통해 근본적인 원인과 처방에 힘을 써야한다는 이야기다. 근시안적 선택은 바로 앞의 이익과 만족은 가져다 줄 수 있다. 공자(孔子)는 말했다. “좋아하는 직업을 택하면 평생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라.”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쓴이 임용석은?
고려대학교에서 스포츠 교육학과 인권을 강의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한 그는 청소년농구 대표를 지낸 전도유망한 선수였다. 불의의 사고를 계기로 책을 쥔 그는 학생선수의 교육 및 교육과정에 대해 관심이 많다. 또 스포츠 현장에서의 훈련성과와 인권 등도 깊이 연구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