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안팎에서는 안 후보자의 사퇴가 청와대의 허술한 인사검증시스템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당장은 야권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안 후보자가 지나친 대여 공세의 희생양이 됐다는 점에서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효과도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여야 모두 안 후보자에 대한 직접적인 논평은 자제하면서 여론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 CNB가 안 후보자 사퇴 후폭풍을 맞고 있는 정치권을 들여다봤다. (CNB=도기천 기자)
안대희 후보 ‘전격사퇴’로 보수표 결집 가능성
與 “정치공세 희생양” vs 野 “청와대 책임져야”
지방선거·진영논리 묻혀 정상적 검증시스템 ‘실종’
안대희(59) 전 대법관의 총리 후보 지명은 원칙과 소신, 청렴 이미지를 갖춘 개혁 적임자로서 세월호 정국에서 위기에 놓인 박근혜정부의 ‘구원투수’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비롯됐다.
세월호 참사가 지방선거의 최대 변수로 부각한 상황에서 안 전 대법관의 등장은 국가대개조 수준의 혁신을 이끌 중요한 한 축인 ‘인적 쇄신’을 예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 전 대법관의 낙마는 어떤 식으로든 지방선거에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안 전 대법관은 검찰과 법원을 두루 섭렵하고,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캠프에서 정치쇄신작업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직후인 2003년 3월 검찰의 꽃인 대검 중앙수사부장에 임명돼 성역없는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국민검사’ 이미지를 굳혔다.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은 당시 수사로 ‘차떼기당’으로 낙인찍혔으며, 당시 여권인 열린우리당(새정치연합의 전신)도 사정 칼날을 맞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박지원, 노무현의 오른팔로 통하던 권력실세 안희정까지 기소돼 법원 문턱을 드나들었다.
이런 대쪽 같은 자세가 인정받아 안 전 대법관은 노무현 정부 말기에 대법관에 올랐다.
2012년 대법관 임기를 마친 뒤에는 잠시 변호사 활동을 하다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캠프에 영입돼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박 대통령의 정치쇄신 대선공약을 성안했다.
총리에게 장관 제청권을 부여하고, 장관에게 부처 및 산하기관 인사권을 보장하는 등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끊는 조치라든지, 측근 비리 근절을 위한 특별감찰관제와 상설특검제, 불체포특권 폐지 등 국회의원 주요 권한 손질,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등 정치쇄신 공약을 입안했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대선 캠프에 나라종금 사건으로 실형을 받았던 한광옥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영입하자 “무분별한 비리 인사 영입”이라며 한때 당무를 중단했고, 박 대통령이 자신의 뜻과 달리 대검 중수부 폐지 공약을 발표할 때는 연단 뒤에 서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 때문에 총리후보 지명 때 안 전 대법관은 대통령에게 ‘할 말하는 인물’이라는 점이 부각되기도 했다. 강단있는 ‘특수통’ 검사에 이어 대법관까지 지내며 원칙과 소신 이미지가 강해 세월호 참사 이후 비정상의 정상화, 공직사회 부조리 척결 등 ‘국가개조’ 수준의 혁신을 이끌 적임자라는 것.
안 전 대법관은 총리후보에 확정된 직후 기자회견에서 “초임 검사 때부터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 제게 총리를 맡긴 것은 수십 년 적폐를 일소하라는 것으로 알겠다”며 강한 쇄신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새누리당은 안 전 대법관을 중심으로 정부의 세월호 후속 대책을 착실히 이행함으로써 이탈한 지지층을 복귀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특히 안 전 대법관이 노무현 정권 시절 야권의 호감도가 높았던 인물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며 중립성향의 부동표 흡수까지 조심스레 타진해 왔다.
여권의 한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던 ‘안대희 카드’를 꺼내 들었던 것은 이탈한 여권 지지층을 복귀시킴과 동시에 (안 전 대법관이 노무현 정권때 대법관에 임명됐다는 점에서) 야당의 반발이 적을 것이라는 ‘두마리 토끼’ 잡기 전략이었다”며 “결과적으로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됐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여권의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으로서는 선거에 또 하나의 난관이 조성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청렴성이나 도덕성 측면에서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됐던 안 후보자가 고액 수임료와 전관예우 문제 등으로 중도 사퇴함으로써 박 대통령의 인적 쇄신이 다소 빛이 바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총리 인사가 원점으로 회귀하면서 내각을 비롯한 후속 인사는 물론, 세월호 후속 대책이 상당기간 표류할 가능성도 유권자의 표심을 잡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이 같은 여파 때문에 여권은 신중한 기조 속에서도 안타까움을 연발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한 기초단체장 후보는 “(안 전 대법관이) 과거(2006년) 대법관 청문회를 무난히 통과했던 걸로 봐서 자잘한 문제는 나올 수 있겠지만 낙마까지 가는 결정적 한 방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며 “세월호 참사로 도덕성에 대한 국민적 눈높이가 더 높아졌다는 점을 청와대가 간과한 것 같아 아쉽다”고 꼬집었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여야 할 것 없이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아온 총리 후보자가 지방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사퇴해 당혹스럽다”며 “선거에 끼칠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고 전했다.
물 만난 야권, 심판론 속도
야당은 박 대통령의 ‘인사 실패’를 부각하며 ‘세월호 심판론’ 고삐를 더욱 죄고 있다. 이를 통해 지방선거를 유리한 구도로 끌고 가겠다는 전략이다.
구체적인 타깃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안 전 대법관이 사퇴한 마당에 ‘안대희 의혹’을 다시 거론하는 것 보다는 청와대의 인사검증시스템을 문제 삼아 박근혜 대통령과 비서실을 정면 겨냥 하겠다는 것.
야권의 한 당직자는 “안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을 지방선거 때까지 집중 거론해 선거국면을 유리하게 이끌려고 했는데 너무 빨리 사퇴해 되레 호재를 놓친 셈이 됐다”며 “지금부터는 당연히 김기춘 비서실장 책임론을 부상시키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의 공식 브리핑도 이런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적 신망이 두터운 안 전 대법관을 직접 겨냥하기 보다는 청와대 책임론을 앞세우고 있다.
안 전 대법관 사퇴 직후 박광온 대변인은 “국가재난대응시스템의 붕괴에 이어 청와대 인사 시스템이 붕괴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29일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는 청와대 인사검증시스템의 문제”라며 “김기춘 비서실장의 결단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안 전 대법관을 둘러싼 의혹들이 대부분 사회적으로 통용된 범위 내에서 이뤄졌다는 점, 안 전 대법관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점 등을 들어 여당에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안 전 대법관을 둘러싼 가장 큰 논란은 총리 지명을 받기 직전까지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올린 수입이다. 지난해 7월 서울 용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뒤 연말까지 5개월간 16억여원을 수임료로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져 전관예우 논란이 일었다.
안 전 대법관은 논란이 커지자 지난 26일 국회에 임명동의안이 제출되는 때에 맞춰 “국민정서에 비춰 봐도 너무 많은 액수”라며 “변호사 활동으로 늘어난 재산 11억여원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밖에 지난해 아파트 구입을 둘러싼 실거래가 신고 문제, 아들과 딸에게 각각 5천만원씩을 증여한 것과 관련된 증여세, 위장전입 의혹 등 고위공직자 청문회 때마다 단골 메뉴로 불거져 온 부동산·재산 문제가 이번에도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대부분 의혹들이 말그대로 의혹 수준인데다 그동안 고위층에서 계속돼온 문제들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점에서 안 전 대법관을 두둔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과다한 수임료 등 국민정서상 지나치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있지만 초임 검사 때부터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한길을 걸어온 분이 고의로 재산을 늘리려고 법에 위배되는 일을 벌였겠냐”고 반문했다.
야당의 거센 공세로 안 후보자가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이탈했던 여당 지지층의 결집을 기대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앞서 정치적 난도질과 장외 난전에 휘둘려 능력과 자질을 검증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했다”는 새누리당 박대출 선대위 대변인의 언급도 이런 맥락에서 주목된다.
바닥 민심도 인사검증시스템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안대희’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런 분위기다.
트위터 등 SNS상에서는 안대희 전 대법관에 대한 의혹제기 보다는 정치권의 검증시스템을 꼬집는 목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야권 지지층은 ‘김기춘 책임론’을, 여권 지지층은 ‘정치공세의 희생양’으로 안대희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
평민당 시절부터 30여년간 야권에 몸담아 온 한 인사는 “그(안대희)가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 합류하지만 않았더라도 인사청문회는 무난히 통과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며 “결국 진영논리에 묻혀 인사검증조차 못한 채 아까운 인물을 놓친 게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