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삼성’ 공론화…변화 움직임 곳곳 감지
대대적 사업재편 맞물려 비노조 정책 변화 움직임
삼성은 지난 14일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함께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이는 그동안 ‘백혈병은 직업병이 아니다’고 주장해 온 삼성의 태도가 전향적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와 맞물려 삼성이 창립 이래 지속해온 비노조 경영 방침에도 변화가 올 것이란 기대감이 삼성 주변에 팽배하다.
전환기에 선 삼성이 그룹 2인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비노조 정책을 수정할 것이라는 설에서부터 이미 노조 설립이 허용된 마당이라 굳이 정책을 고수할 필요성이 없어졌다는 대세론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노동계와 삼성 주변에서는 백혈병 사태 해결의 다음 수순으로 ‘비노조 경영 방침을 수정할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삼성은 선대 회장의 경영방침에 따라 지난 70여년간 비노조를 고수해 오면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한 상태다. 헌법에서 보장한 노동자의 권리를 가로막고 시대 흐름에 역행한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비노조 방침에 따른 불신과 오해도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사 노조의 사례다. 사실 이 노조는 삼성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 계열사인 삼성전자서비스의 하청업체 100여개사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노조를 만든 것으로, 삼성이나 삼성계열사들은 해당 업체들의 지분을 단 1주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지난해 민주노총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를 세웠고,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의하며 현재 삼성 서초사옥 앞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고 있다. 지난 17일에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센터분회장인 염모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자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삼성의 ‘무노조경영’이 ‘또 하나의 가족’을 죽였다”며 성명을 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26일 CNB에 “삼성전자서비스는 삼성 계열사지만 삼성전자서비스의 협력사들은 삼성과 전혀 무관한 독립법인들”이라며 “따라서 해당 법인들의 소속 직원은 삼성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밝혔다.
삼성과 무관한 협력사의 직원들이 ‘삼성전자서비스지회’라는 이름으로 노조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의 비노조 정책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기존 노조가 없는 틈을 타 협력사 소속 직원들이 ‘삼성’ 이름을 가져온데 따른 것이다.
변화요구 수용, 물 흐르듯 간다
이처럼 비노조로 인한 각종 문제가 여기저기서 불거지면서 삼성의 경영승계·사업재편에까지 부담을 주고 있다. ‘비노조 철회설’도 이런 배경에서 회자되고 있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CNB와 통화에서 “복수노조 허용 등 과거와는 법제도가 달라져 설령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상황이며, 이미 상당수 계열사에 여러 노조가 존재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노조 문제는 각 계열사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할 문제로 그룹 차원에서 개입할 여지가 없다”고 전했다.
삼성의 태도변화는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등 관련법 개정으로 노조설립 자체가 한결 쉬워진 점도 한몫을 했다. 에버랜드 노조가 2011년 설립됐고, 최근에는 삼성SDI와 삼성코닝에 노조가 만들어졌다.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국제사회의 시선이 따가워진 것도 부담이다. 최근 타이와 독일에서 열린 제조산별노조 아시아총회와 국제노총 회의에서는 삼성의 비노조 경영이 핵심 의제로 다뤄지기도 했다.
삼성이 비노조 방침을 수정할 것이라는 전망은 이재용 부회장에 거는 기대와 맞물려 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유지를 지키려고 했던 이건희 회장과 달리 이 부회장에게는 이같은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데다, 삼성의 사업혁신이 ‘명분’보다는 ‘실리’ 위주로 속도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은 지난해 연말 제일모직의 패션사업부문을 삼성에버랜드로 이전하면서 사업구조 혁신에 시동을 걸었다. 삼성SDS, 삼성에버랜드, 제일모직, 삼성SDI, 삼성종합화학, 삼성석유화학, 삼성생명 등 핵심계열사들이 최근 6개월새 줄줄이 합병·이전·인력감축 등 대규모 사업구조조정을 실시했다.
삼성생명을 중심으로 한 금융 계열사들의 지분 정리 작업도 본격화 되고 있다. 삼성전기, 삼성정밀화학, 삼성SDS, 제일기획 등 비금융 계열사가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을 처분하고 삼성화재와 삼성자산운용 등 금융 계열사의 지분을 삼성생명 쪽으로 모으고 있다. 삼성SDS를 연내 상장하겠다는 지난 8일 발표는 구조개혁에 방점을 찍었다.
이 부회장이 전자·금융 계열사를 맡고, 장녀인 이부진(44) 호텔신라 사장이 호텔·건설·중화학을, 차녀인 이서현(41) 제일기획 사장이 패션·미디어를 맡는 이른바 ‘3분할 전략’이 윤곽을 드러낸 것이다.
‘더 나은 삼성’을 향한 노력도 최근들어 부쩍 감지되고 있다. 삼성은 지난 1월 신입사원 채용제도를 혁신하겠다며 ‘대학총장 추천제’를 내놓았고, 2월에는 정년 60살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시행했다. 앞서 지난해 연말에는 ‘삼성이 국민에게 사랑받는 대표 기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관한 여론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이다 보니 노조 문제와 관련, 그룹의 2인자인 이 부회장에게 자연스레 눈길이 가고 있는 것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CNB에 “삼성은 노조에 반대하거나 이를 허용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했던 게 아니다. 사원들의 권익과 복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고민해온 가운데 노조 형태보다는 사원협의회를 통한 노사 간 협의방식을 선호해 온 것”이라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은 CNB와 통화에서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경영 승계에 사회적 승인이 필요하다는 전제에서 볼 때 삼성에 대해 변화의 기대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함부로 예단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