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고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전 국민이 사랑하는 수필집 피천득의 ‘인연’중에서 명언이 된 구절입니다.
몇 번을 되새겨 읽어봐도 가슴시릴 정도로 만남과 이별에 대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글입니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엔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인연도 있나 봅니다.
이제껏 알지도 못하는 곳에서 이제껏 각각 다른 모습으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내 삶속에 찾아온 그… 그가 나에게 어떤 인연일까? 항상 의문을 가지면서 시간은 흐르고, 이제 그와의 인연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인연은 아니란 생각을 갖게 하는 사람… 이런 인연을 운명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살아갑니다.
그 중에는 잠시 스쳐가는 인연도 있을 것이고, 아주 오랜 시간동안 우리 곁에서 함께하는 피천득의 운명 같은 인연도 있을 겁니다.
평생을 서로가 함께 하는 인연.
서로의 허물도 이해해주고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행복해지고 싶은 인연.
그러한 인연이 닿아 부부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법망경’에서는 부부의 인연을 맺으려면 칠천겁의 인연이 쌓여야 한답니다.
겁은 불교의 시간 단위인데, 일겁은 일천 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로 집채만 한 바위를 뚫어내는 시간이며, 일백년에 한 번씩 내려와 스쳐가는 선녀의 치맛자락으로 그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랍니다.
여기 칠천겁의 인연으로 맺어진 부부의 사랑이 백제가요 ‘정읍사’에서도 그려집니다.
달이 높이곰 돋으시어
어기야, 멀리곰 비치오시라
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느 시장에 가 계신가요
어기야, 진 데를 디딜세라
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어느이다 놓고시라
어기야, 내 님 가는 그곳 저물까 두려워라..어기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전주의 속현인 정읍에 살고 있던 장사꾼의 아내가 높은 산에 올라 길 떠난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노래입니다.
언덕에 올라 달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여 ‘진 데’를 밟을지 모르니 길을 환히 밝혀 달라고 비는 대목에서 아내의 걱정스러운 마음과 기다리는 애틋함이 절절히 느껴집니다.
한 몸 둘로 나누어 부부를 만든 것이니
있을 때 함께 늙고 죽으면 한 데 간다.
어디서 망령의 것이 흘리려 하는고.
부부는 본래 한 몸이었는데 둘로 나뉘어 부부로 태어났다는 것.
함께 늙고 함께 죽을 삶의 동반자라는 것.
그러니 서로가 서로에게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
훈민가(조선시대, 정철)라는 노래 또한 부부란 인연은 함께 늙고 함께 죽을 삶의 동반자른 것을 일련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에는 이렇게 칠천겁의 인연으로 맺어져 일심동체(一心同體)로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을 담은 정읍사의 노래가 먼 나라 얘기가 되어 가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결혼 33만쌍, 이혼 11만쌍’
지난해 33만쌍이 결혼한 반면 11만쌍은 이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황혼부부와 신혼부부 이혼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혼부부는 매년 증가해 2012년 26.4%나 된다는 안타까운 통계를 보여줍니다.
힘겨운 삶을 함께 일궈 온 배우자에 대한 사랑과 거기서 우러나온 깊은 신뢰를, 살아가며 다가오는 많은 유혹과 시련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부부라는 연은 더욱 단단하게 묶여야만 하는데… 수많은 이들이 그 칠천겁의 인연으로 만난 부부의 연을 다하지 못한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소중한 인연이 이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남편은 남편의 도리를, 아내는 아내의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칠천겁의 인연으로 맺어진 부부라는 인연을 소중히 되새겨 봐야만 할 것 같습니다.
5월 21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 4월 방문고객 1000명을 대상으로 부부의 날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부부의 날 인지자는 24%로 낮았으나, 인지자 중에서 선물을 구매할 예정이라고 답변한 사람은 68%에 육박했다고 전합니다.
어린이날은 36%, 스승의 날은 21%가 선물을 할 예정이라고 답변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높은 수치입니다.
시계를 팔아 아내의 머리핀을 선물로 산 남편과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의 시계줄을 선물한 아내의 크리스마스선물(‘오헨리’의 소설)의 감동적인 스토리처럼, 지금은 가진 것이 많지 않고 앞으로도 많은 어려운 시간들이 있을지라도 서로를 향한 사랑과 그 보다 더 깊은 정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껴두었던 고백을 손편지에 담아보면 어떨까요?
그동안 부부로 만나 함께 살아가며 미운 정, 고운 정 가득한 당신이 늘 내 곁에 있어주어서 참으로 고맙다고,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당신이 나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고백한다면… 처음 만날 때의 애틋함과 뜨거운 사랑의 속삭임은 아니지만 어느새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삶의 동반자가 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 줄테니까요.
감사와 사랑의 표현은 아끼지 말아야 후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부부의 날, 이 땅의 모든 부부들이 후회없는 고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과 나는 칠천겁의 인연으로 만난 부부니깐요.
당신의 머리 맡에 수줍은 편지를 올려 놓겠습니다.
(글=경북지방우정청 문화담당 이경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