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코치 카터’를 봤다. 30번 이상 본 농구영화다.
“끼익 끼익, 탕 탕 탕.” 나무 바닥에 울리는 신발 끌리는 소리와 드리블 치는 소리다.
죽음의 왕복달리기인 수어사이드, 반복적으로 여러 가지 기구를 들어야 하는 서킷 트레이닝, 시간에 맞춰 반복적으로 뛰어야하는 인터벌 등 영화 속에서 사용되는 많은 단어들이 농구선수 출신인 내게 너무나도 익숙하다.
70년대 농구스타 켄 카터는 고심 끝에 리치몬드 고등학교 농구부 감독직을 수락했다. 아주 오랜만에 모교에 왔지만 자신이 경험했던 학창시절과 전혀 바뀌지 않았다.
가난, 비행, 폭력이 만연한 환경 속에서 학생선수들은 농구만 한다. 수업은 그들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영화 속 한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수업시간에 학생선수들의 얼굴을 보는 것은 마치 ‘개기일식’을 보는 것과 같다. 나의 중 고교시절 생활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영화 내용. 난 이 영화를 보고 또 보고 다시 본다.
“These boys are student athletes. Student comes first.”
“이 아이들은 ‘학생선수’입니다. ‘학생’ 신분이 먼저입니다.”
켄 카터의 대사 중 나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말이다. 나의 운동일상과 달랐던 단 한 가지는 코치의 역할이다. 캔 카터는 열악한 학생선수들의 현실을 바꾸고자 ‘선수’ 뿐 아니라 ‘학생’의 역할도 강조했다. 내가 경험해왔던 있던 코치와는 전혀 다른 역할이다.
코치는 1500년대 헝가리에서 마차를 모는 마부를 뜻했다. 손님을 원하는 곳에 안전하게 안내하는 것이 역할이다. 300여년 뒤, 잉글랜드에서는 가정교사를 코치라고 불렀다. 이 시대의 코치는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란 의미였다.
근대에 들어서 스포츠 지도자를 코치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분업화된 사회의 흐름에 따라 코치는 각 분야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연예코치, 학습코치, 소통코치, 인터뷰코치 등 많은 직업에 코치를 붙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코칭(Coaching)은 기술 전수이고 티칭(Teaching)은 지식 전달이다. 둘의 공통점은 누군가를 지도하는 행위이다. 즉 학습자를 가르치는 교육행위이다. 기술 전수와 지식 전달에서 교육측면이 배제된다면 그것이 교육일까? 어떠한 형태의 가르침에서도 비교육적인 언어와 행동을 통한 전달은 본연의 모습을 왜곡 시킬 수 있다.
나의 학생선수시절, 학생이 받아야 할 교육보다는 오직 이기기 위한 운동 연습만이 있었다. 결코 교육적이라 할 수 없는 훈련이 주가 된 일상을 살았다. 학교수업과는 상관없는 농구부 생활만이 존재했다. 수업에 빠지는 일, 삭발, 욕 등이 서울사람들이 표준어를 쓰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생활이었다. 아무도 이러한 문제들을 바꾸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이기 때문이다.
거시 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존 메이너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말했다. “변화에서 가장 힘든 것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가지고 있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change(변화)의 g를 c로 바꾸면 chance(기회)가 된다. 변화는 곧 기회다. 변화는 시도돼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 ‘학생선수’란 말은 생소하기만 하다. 코치 카터와 같이 진심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일선의 지도자가 많아진다면 5년, 10년 후에는 ‘공부하지 않는 운동부 학생’이 이상한 단어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글쓴이 임용석은?
고려대학교에서 스포츠 교육학과 인권을 강의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한 그는 청소년농구 대표를 지낸 전도유망한 선수였다. 불의의 사고를 계기로 책을 쥔 그는 학생선수의 교육 및 교육과정에 대해 관심이 많다. 또 스포츠 현장에서의 훈련성과와 인권 등도 깊이 연구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