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조원대 유상증자를 성사시키며 화제를 모은 바 있는 SBI저축은행(구 현대스위스저축은행)이 최근 사기대출 사건에 휘말려 속앓이를 하고 있는 사연을 CNB가 단독 취재했다.
SBI저축은행 직원을 사칭해 대출사기를 주도한 일당은 SBI로부터 수억원대 대출을 받도록 해주겠다며 피해자들로부터 예치금 명목으로 수천만원씩을 챙기다 경찰에 고발됐다. (CNB=도기천 기자)
가짜서류·명의도용…‘대출사기단’ 출현에 속수무책
피해자 오씨, 예치금 명목 보름새 10차례 ‘돈’ 뜯겨
대출모집인 동원한 ‘호객 대출’ 관행 다시 ‘도마 위’
피해자 오수진(가명)씨와 금융권 관계자 등에 따르면, 오씨는 지난 2월 17일 대출신청 사이트를 통해 5000만원 규모의 대출을 신청했다.
이틀 뒤 SBI저축은행의 위탁계약사인 (주)원앤아워스 소속 대출모집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조모 대리로부터 대출을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조 대리는 대출조건으로 340만원을 예치해 줄 것을 오씨에게 요구했다. 오씨의 신용상태가 낮아 현 상태에서는 정상대출이 어려우므로 일정 정도의 예치금이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오씨는 조 대리가 지정해준 계좌에 예치금을 입금했지만 대출은 이뤄지지 않았다. 조 대리는 오씨에게 “카드대금 연체가 확인돼 대출이 어렵게 됐다” “타 금융사에도 대출신청을 한 사실이 있어 승인이 어렵다”는 등의 구실을 대며 추가로 348만원을 예치해 줄 것을 요구했고 오씨는 이에 응했다.
이후에도 조 대리는 “예치금 비율과 대출금 비율이 맞지 않다”며 대출금액을 1억5000만원까지 늘렸고, 이에 비례해 예치금도 더 입금할 것을 종용했다. 이런 수법으로 지난 3월초까지 총 10회에 걸쳐 3385만원이 조 대리 측에 송금됐다.
뒤늦게 대출사기를 의심한 오씨가 조 대리에게 항의하며 예치금 전액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SBI저축은행 이사(임원)라고 밝힌 박모 씨가 나타나 ‘정상적으로 대출해 주겠다’는 내용의 확약서를 써줬다.
하지만 CNB 취재 결과, SBI저축은행 박 이사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었고, 대출모집회사 직원인 조 대리는 명의를 도용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확약서를 비롯한 대출관련 서류들도 전부 가짜였다. 누군가가 조 대리를 사칭해 대출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전국은행연합회에 확인한 결과, 조 대리는 대출모집인으로 정식 등록돼 있었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저축은행과 대출모집 위수탁 계약을 체결한 회사 및 소속 직원(대출모집인)은 반드시 저축은행중앙회에 등록하도록 해 누구나 홈페이지에서 얼굴사진 등 신상조회가 가능하다”며 “대출모집인을 사칭하는 사기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대출모집인의 신상조회가 가능하다는 점을 되레 역이용한 사건으로 보인다. 대출모집인의 신상정보를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가짜모집인이 진짜모집인 행세를 하며 대출사기극을 벌인 것이다.
SBI저축은행 관계자는 8일 CNB에 “자체적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은행대출시스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며 “(사기 용의자들이 사용한) 대출관련 서류들은 은행에서 사용하는 양식이 아니었으며, 직인도 완전히 달랐다. 전형적인 대출사기로 보인다”고 밝혔다.
더구나 피해자는 오씨 뿐이 아니었다. 이 관계자는 “오씨와 비숫한 사례가 한건 더 발생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용의자들이 사용한 은행계좌, 핸드폰 등을 추적하기 위해 피해자들에게 경찰에 신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명의를 도용당한 ‘진짜’ 조 대리는 최근 회사를 그만둔 상태다. 신용이 생명인 대출모집인 신분인지라 이름을 도둑맞은 상태에서 더 이상 대출업무를 진행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조 대리가 소속된 원앤아워스도 지난 3월말 SBI저축은행과의 위탁계약이 해지된 상태다.
SBI저축은행 측은 곤혹스럽다는 입장이다. SBI저축은행은 지난해 3월 일본 최대의 투자금융그룹인 SBI그룹에 인수되면서 겨우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발판을 마련한 상태다. SBI저축은행의 전신인 현대스위스저축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5% 미만에 그치며 금융당국의 제재를 받는 등 영업정지 문턱까지 갔던 바 있다.
최근 대주주인 SBI홀딩스로부터 총1조102억원 규모의 유상증자 지원을 받아 금융위원회로부터 지난달 30일 경영개선명령 해제 결정을 받고 새출발을 다짐하던 차에 불미스런 사건에 휘말린 것.
SBI저축은행 관계자는 “은행을 사칭한 대출사기 사건이 연달아 발생해 곤혹스럽다”며 “대출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반드시 해당 지점에 확인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제2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신용등급이 낮아 제1금융권(시중 은행)에서 대출받기 힘든 고객들이 저축은행, 신협 등 제2금융권을 이용하고 있는데, 고객의 이런 약점을 이용해 대출모집인을 사칭한 사기대출이 횡횡하고 있다”며 “특히 (지난 1월) 카드사 정보유출 사태 이후 대출모집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진짜 대출모집인들이 개점휴업하고 있는 틈을 노려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최근 들어 대출사기가 빈번하자 신용조회에서 실제 대출에 이르기까지 금융시스템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구멍난 신용정보조회시스템, 대출모집인을 통한 호객 행위 등 금융권에 만연한 병폐들에서 이번 사건이 비롯됐기 때문이다.
금융당국도 최근 위탁계약사의 불법 대출모집 행위를 묵인한 저축은행들에 대해 관리책임을 물어 제재에 나서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있지만 사기대출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1일 위탁계약사 소속 대출모집인이 다단계 대출모집을 하거나 대출희망고객의 유무와 상관없이 신용정보를 조회해온 행위를 관리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물어 인천 모아저축은행 임직원 7명에게 주의 등 조치를 내린 바 있다.
금융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대출모집인이 자금을 알선하거나 중개수수료를 챙기는 행위를 관련법규에서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지만, 생존경쟁에 내몰린 (대출모집) 위탁사들이 이를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며 “저축은행들이 위탁사의 이런 행태를 모른 채하고 있는 가운데 사기대출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은행들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CNB=도기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