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여정을 거닐다 보면 모든 것이라 믿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곧 모든 게 되기도 한다.”
호반건설의 호반문화재단이 서울 광화문 한국프레스센터 1층에 문을 연 미술관인 아트스페이스 호화. 아트스페이스 호화의 두 번째 전시회의 팜플렛에 적혀 있던 말이다. 그 주인공은 철선을 사용해 조각적인 회화를 보여주는 박승모 작가였다. 이번 전시회의 타이틀은 ‘모든 것과 아무 것도 아닌 것(Everything and Nothing)’.
첫 번째 전시인 ‘액트 원 더 글리터 패스(ACT. 1 THE GLITTER PATH)’ 작품 중에서 인도계 영국인 설치 미술가인 아니쉬 카푸어의 ‘MIRROR’만이 입구에 남아있고, 내부의 작품은 모두 박승모 작가의 ‘MAYA’ 시리즈로 바뀌었다.
작품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작가의 요청으로 미술관의 내부 바닥도 하얀색으로 바꿨다고 한다. MAYA6199, MAYA9077 등 영문 마야와 숫자를 조합한 이름을 가진 이 작품들은, 우리가 공사장에서 만날 수 있는 철선을 사용했다. 구부러지거나 직선인 검은색 철선을 자르고 이어붙여서, 가까이에서 볼 때와 멀리서 바라볼 때 다른 이미지를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철선이 서로 다른 두께로 뭉쳐져 있을 뿐이지만, 몇 발자국 뒤에서 조망하면 생각에 잠긴 여성, 거리를 걷는 시민, 커피를 기다리는 사람의 이미지가 보인다.
이는 WINDOW 시리즈로 불리는데, 유리창에 비친 안과 밖이 합일된 세계를 철망으로 물질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작업으로 보였다. 인식론적으로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가 정말 그러한 것일지에 대한 생물학적 물음, 우주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내가 보는 세계는 인간의 시지각일 뿐이고, 고양이와 돌고래의 시지각에서 세계는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은유로 볼 수도 있다. 박 작가는 실재와 환상을 분리해서 ‘헛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한자 ‘환(幻)’을 표현해왔다고 한다. 우리가 살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 모든 의미를 가진 중요한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진실 또는 윤리의 문제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런 삶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한 존재의 깨달음의 과정이 변곡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순간에 많은 어려움과 충격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을 온전히 지난다면 보다 나은 존재가 되지 않을까.
박승모 작가의 개인전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창문 안의 세상과 바깥의 세상이 있고, 창문으로 보이는 안쪽 프레임,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쪽 프레임이 존재한다. 이런 공간과 존재의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아이로 태어나 학습과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육체의 노화로 인해 스러져가며, 그런 공허함을 이겨내고 보다 나은 인류의 존재성을 획득하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품을 남기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않을까.
유니크하면서도 울림이 강한 이 전시회를 보고 나와서,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나도 광화문 거리에 몇 가지 추억들이 있는데, 그 기억들도 삶의 지점에 따라서 변화했다. 그것이 시대의 한계 또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절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자 서글픔일 수도 있고, 새로운 발견과 감동의 씨앗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모든 흔들림, 변화는 행복과 밝은 미래, 윤리적 존재의 완성을 위해서 마련된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허공의 징검다리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