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던 동생이 생겼다. 몽실이란다. 운동하러 자주 가는 공원에서 만났다. 평행봉에 막 폴짝 뛰어올랐을 때였다. 내가 지나온 오솔길에서 나타났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몽실이를 데리고 모래 운동장에 들어섰다. 비숑 프리제로 추정되는 동글동글하게 생긴 몽실이는 카바디 선수처럼 빨랐다. 걸음 느린 노인은 따라다니지 않고 그저 그윽한 미소를 띄었다. 몽실이가 즐겁게 뛰어 놀아서 흡족한 표정이었다.
목줄 없이 냉큼 나타난 몽실이는 여기저기 해맑게 뛰어다니다가 나를 발견하곤 인상을 구겼다. 평행봉에서 위아래로 저작운동을 하던 내 표정도 구겨졌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침 뱉는 형들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 형, 아니 몽실이는 내 발밑으로 와서 하얀 이빨을 드러냈다. 발 냄새를 킁킁 맡더니 더욱 사납게 짖어댔다. 아무래도 처음 맡는 냄새라서 경계했던 것 같다. 내가 내려가기만 하면 물려고 들었다. 어쩔 수없이 팔을 쭉 펴고 올라가 버텼다. 한계치에서 마지막 한 개를 더 할 때 근육이 성장한단 말이 스쳐 지나갔다. 몽실이 덕분에 근육이 한 뼘 자란 듯했다.
힘은 금세 빠졌다. 더욱 두렵기 시작했다. 먼발치서 뒷짐 지고 꽃구경하는 할아버지에게 외쳤다. “얘 좀 어떻게….” “몽실아 오빠야 괜찮아” 안 괜찮은 건 나였다. 나 좀 괜찮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한 건데 할아버지는 강아지를 안심시켰다. 물리려는 쪽은 관심 밖이었다. 어느 동생이 오빠를 물려고 든단 말이오. 난생 처음 보는 동생은 나와 달리 야성적이었다.
불현듯 찾아온 해후는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없던 조카도 생겼다. 불행한 만남은 금방 찾아왔다. 이틀 뒤에 같은 공원에서 턱걸이를 할 때였다. 오솔길에서 머리를 곱게 빗은 할머니와 그보다 더 찰랑거리는 털을 뽐내는 요크셔테리어가 나타났다. 할머니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봐 삼촌 힘세다.” 온화한 할머니와는 달리 요키는 전투력이 높았다. 깨끗한 털 만큼이나 광택이 나는 이빨을 드러내며 점점 다가왔다. 철봉을 붙잡고 온몸으로 울었다. “힘세 보여도 개에 물리면 아파요. 피도 나요. 제발 말려줘요 할머니” 조카가 갈 때까지 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냥 소리 내어 짖을 껄 그랬다. 그럼 진심이 전달됐으려나. 컹컹.
요즘 몽실이와 요키와 그의 친구들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짝인 반려동물 인구가 1500만에 달한다는데도 몰랐다. 반려라는 이름으로 함께 다니는 무리의 동선과 나의 동선이 겹치지 않아서 몰랐다. 나는 반려동물과 동거해본 적이 없다. 수 년 째 나만 알던 비밀 운동장에 그들의 노선이 닿자 비로소 실감했다.
이건 시작이었다. 야성미로 무장한 동생과 예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를 지닌 조카를 만나 놀란 가슴을 쓰러 내리며 찾은 마트에서 제대로 느꼈다. 반려동물을 위한 매장이 생겼다. 그런데 그 마트에서 가장 컸던 주류 코너의 규모를 압도했다. 반려동물 용품에 견줘 주류는 비주류로 밀려났구나, 썰렁한 말장난을 떠올리며 바구니에 맥주를 담았다.
온라인에서도 놀라움은 이어졌다. 메일함을 열었는데 한 백화점이 봄학기 문화센터에 ‘댕댕이와 함께하는 도그요가&도그 마사지’ 강좌를 개설한다고 했다. 저명한 강사가 나서 요가로 반려견과 교감 나누는 법을 알려준다고, 보도자료는 알렸다. 이 과정을 배우면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난데없는 습격에 대처할 수 있을까? 아참, 나는 반려동물이 없지. 몽실이에 놀란 가슴도 채 진정되지 않아 수강신청은 하지 않았다.
최근 일련의 만남을 겪으면서 김훈 소설 <개>의 멋들어진 개 보리를 떠올렸다. 보리는 인간의 생활전선에서 어우러져 산다. 바삐 돌아가는 어촌 마을에서 마구 활개 친다. 그런데 선을 지킨다. 인간과 자신 사이의 선이다. 주인 할머니가, 손녀 영희가 그렇게 납득시켜 와서 그런다. 적당한 상황에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해서 그런다. 보리는 영희와 친구들의 등굣길에 뱀이나 다른 위협적인 개들을 쫓아내는 정도로만 인간사에 관여한다. 그리고 돌아서 묵묵하게 제 갈 길을 간다. 당당하게 동네 구석구석 냄새를 맡고 다닌다. 어우러져 살되 자기만의 노선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갈길 아는 자의 뒷모습은 언제 봐도 찬란하다.
이런 의젓함은 사려 깊은 보리의 타고난 성정도 있겠지만 주인이 그어준 선 영향이 클 것이다. “오빠야 괜찮아” 정도의 희미한 선이 아니다. 주인이 그은 굵고 선명한 선이 보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보리 역시 그냥 뒀으면 몽실이처럼 본능대로 살았을 지도 모른다. 여기저기 날을 세우며. 그래서 보리의 일대기가 담긴 이 책을 꼭 권독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지금 공원에 계십니까? 몽실이 할아버지.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