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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엄유정 작가와 현대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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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손정호기자 |  2021.11.04 10:42:54

현대카드 아이언 앤 우드에 있는 엄유정 작가의 그림을 이용한 파사드. (사진=손정호 기자)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Best Book Design from all over the World)’ 전시회가 있었다. 서울 성수동의 에스팩토리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서 엄유정이라는 작가를 알게 됐다. 엄 작가의 식물 드로잉이 실린 ‘푀유 FEUILLES’라는 그림책은 독일에서 매해 열리는 이 대회에서 글로벌 1위인 골든레터(Golden Letter) 상을 받았다고 한다.

‘푀유’를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푀유는 프랑스어로 잎사귀라는 의미인데, 엄 작가는 주로 식물의 모습을 거칠지만 부드러운 선으로 그린다. ‘푀유’는 북 디자이너 듀오인 신신(신해옥, 신동혁)이 만들었다. 책을 넘길 때마다 드로잉의 선과 종이의 두께가 점점 두꺼워진다고 한다. 미디어버스에서 출판하고, 문성인쇄에서 제작했다. 미술 비평가 안소연의 글은 별책으로 있다. 이 책을 소장하고 싶었지만, 리미티드 에디션이라서 꿈을 이룰 수 없었다.

 

독일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대회에서 글로벌 1위인 골든레터 상을 받은 그림책 '푀유'. (사진=미디어버스)

이후에 이 책의 화가인 엄 작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엄 작가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워해서 그림을 살펴보다가,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밤 - 긋기’ 전시회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탄소 중립’ 엑스포에서 삼성, 현대, LG, SK, 한화 등의 부스를 살펴보고, 저녁에 ‘밤 – 긋기’ 전시가 궁금해서 택시를 탔다.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는 청와대 옆 골목길 사이에 있었다. 조금씩 해가 기울고 어둠이 새처럼 땅으로 내려왔다. 아주 작은 크기의 공간이었는데, 종이에 과슈로 그린 흑백의 멍한 사람 얼굴, 식물 그림이 덤덤하게 있었다. 밤에 취한 사람의 얼굴이 이상하게 마음을 빼앗았다. 허공에 뚫린 길 같기도 했다. 엄 작가의 원화를 갖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고재 디자인 프로젝트 스페이스에서 열렸던 엄유정 작가의 개인전 '밤 - 긋기'. (사진=손정호 기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식물 예찬’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는데, 엄 작가의 그림도 있었다. 녹색과 갈색빛의 작은 식물 그림 여러 개를 모은 ‘Plant’ 시리즈가 있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흑색으로 시든 식물을 그린 작품도 있었다.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지나, 엄 작가의 담담한 그림 앞에서 나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현대카드의 골프 공간인 아이언 & 우드(iron & wood)는 도산공원 옆에 있었다. 신나게 뛰어가는 사람의 모습을 거칠지만 부드러운 선으로만 표현한 엄 작가의 그림이 하얀색 전면 파사드에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고, 배달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허공에 드리워진 전선, 엄 작가의 사람 드로잉이 도산공원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토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화여대박물관의 기획전시 '식물 예찬'에 있던 엄유정 작가의 그림. (사진=손정호 기자)

그리고 옆에 있는 도산공원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동상, 조깅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안창호기념관에는 선생님의 생애와 이후 사업에 대한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때 내가 엄 작가의 그림에 빠진 것은 어쩌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제 강점기를 거쳐 여전히 휴전 상태인 우리의 현실에서 살아가는 나, 그리고 우리. 세상에서 제일 빠른 속도로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우리. 그런 시간에 어떤 한국인이 세계 1위를 했다고 하면 그것만큼 기분 좋은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느림에 대해, 식물성에 관해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한 시기에 접어든 것 같고, 그때 엄 작가의 골든 레터 수상이 울림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나는 도산공원을 잠시 걸으며 내가 기억하는 어떤 분과의 인연, 지금까지의 내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엄 작가의 단순하지만 쾌활한 사람 그림을 뒤돌아보며, 도산공원에서 천천히 걸어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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