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뜩잖게 눈이 떠지는 아침이면 여지없다. 같은 꿈을 꾼 것이다. 사방이 막혔다. 그 안에는 새하얀 부유물들만 떠다닌다. 네모반듯한 기십 개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열 맞췄다. 개인에게 허락된 생활반경은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부유물 하나. 그 위에선 몸가짐도 통제 당한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있어야 한다. 강령을 받아들이기 힘겨운 이들은 저마다의 통증을 호소한다. 자세의 자유를 요구하는 외침은 쉬이 묵살 당한다.
고통을 참는 사람들의 얕은 신음이 점차 커지면, 살을 에는 불안감으로 잠에서 깬다. 정확히 17년 묵은 내재된 불안인데 여전히 옥죄고 있다. 이 강박은 ‘병상 군기’란 말로 바꿔도 상관없는 것이다. 부자유의 잔재가 날카롭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면 그때의 탈출구를 다시금 들춘다. 그때 나를 훑었던 또 다른 내가 있는 곳.
의무대의 복도는 길고 쿰쿰했다. 한쪽에서 하늘을 동경하듯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목발 짚고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면 그 끝엔, 작은 위안이 있었다. 시큼털털한 소변기를 붙들고 있자면 정확히 눈높이에 걸린 소박한 그림 한 점이 나를 비췄다. 전역하고 알았다. 미국 경제대공황 당시, 고독한 인간의 고독함과 고립감을 주로 그린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아침해’라는 것을.
그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모든 제약이 풀리고 고통이 경감되는 듯했다. 거울 같았기 때문이다. 허연 침대보에 우두커니 앉은 여인. 방 안엔 그것 말곤 무엇도 없다. 창밖을 향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선 아무 표정도 읽을 수 없다. 앙다문 입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다만 확실했던 건 그녀와 내가 동일시되는 느낌. 고립감이 나만의 것은 아니란 동류의식이 악몽 같은 시간을 견디게 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걸어 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외로움은 타인의 외로움으로 해소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야기한 단절의 시대, 지금 필요한 것이 동류의식 아닐까. 자가, 자발, 집단(코호트)이란 이름으로 이격되어 있지만, 당신의 사정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 표정마저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우리는 혐오의 대상이 아닌 공동체라는 시민의식. 자가격리 중인 이웃의 문고리에 간식거리와 함께 격려의 메시지를 걸어둔 이들의 손길도 시련을 함께 견디자는 동류의식에서 비롯했으리라. 우리란 말이 새삼 살갑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경칩이 지났지만 땅은 여전히 굳어 있다. 하지만 얼었던 땅은 언젠가 녹는다. 견디면 새싹은 반드시 돋아난다. 졌던 꽃은 다시 필 것이다.
방탄소년단은 노래한다. “All the underdogs in the world, A day may come when we lose. But it is not today. Today we fight”(세상의 모든 약자들아, 언젠가 우리가 지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오늘 우리는 싸운다.) 언젠가 꽃은 지겠지만 그 때가 오늘은 아닌 것이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