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에서 ‘노조(근로자)추천이사제’ 도입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다.
발화점은 IBK기업은행이다. 기업은행 노사는 최근 노조추천이사제를 유관 기관과 적극 협의해 추진키로 합의했다. 준비 작업이 순탄하게 이뤄질 경우 내년에 만기인 사외이사 중 한명이 노동자가 추천하는 인물로 이사진에 입성하게 된다. 전대미문 금융권 최초로 실제 성사 여부가 예의주시 되고 있다.
일단 노조추천이사제는 노동이사제의 전 단계로 볼 수 있다. 유럽 약 19개국에서 운용하고 있는 노동이사제는 근로자가 기업 이사회의 이사로서 발언권과 의결권을 갖고 공식적으로 회사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문재인 정권의 대선 공약이자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노동이사제를 공공기관부터 시작해 차츰 민간영역까지 확대시켜 나가겠다는 복안이었지만, 아직까지는 현실화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다.
다만, 앞서 서울시가 산하기관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한 이래 각 지자체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이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
반면, 노조추천이사제는 노동조합 간부 등이 직접 이사로 참여하지는 않고 노조가 추천한 외부 인물을 이사회 구성원으로 앉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간접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노동이사제의 의무화를 위해선 ‘상법’,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등이 개정돼야 하지만 노조추천이사제는 지금 당장이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상법’과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 등에서는 6개월 전부터 금융회사의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 총수의 1만분의 10이상에 해당하는 주식을 보유한 자는 소수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주주총회일의 6주 전에 주주제안 형식으로 근로자 이사를 추천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이사제는 고사하고 노조추천이사제 또한 금융권은 물론 일반기업에 도입된 사례는 없다. 노동자 측 이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으로 재계와 야당 등을 중심으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근로자가 직·간접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경우 의사결정 지연과 투자위축 등이 우려된다는 주장이다. 특히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하는 중대 사안에 대해 노조의 동의 때문에 늦어지거나 공격적 결정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
기업경영의 자율성을 침해함은 물론 노조의 이익만을 대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이는 그동안 금융권에서 여러 번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무산된 이유기도 하다. KB금융 노조는 수차례 노동자 추천 사외이사를 추진했었지만 주주들의 반대와 자진 철회 등으로 접어야 했다.
기업은행·한국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의 경우 민간금융사와 달리 은행장이 제청하면 관계 정부부처의 장(금융위원장, 기획재정부 장관)이 임명하는 구조로, 이 역시 노조 측에서 사외이사를 추천해 시도했지만 좌초됐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노동자 측 이사 도입이 안 될 이유는 뭔가? 반문해본다.
과거 막강한 권력에 비해 부당한 영향력에 대해서 거의 제재를 받지 않았던 금융계 ‘4대천왕’ 문제가 있었다. 또 채용비리, 측근·낙하산 인사, 불완전판매로 인한 대규모 소비자 피해 야기 등은 심각하다.
지금도 제왕적 지배구조는 별반 사정이 나아보이지 않는 가운데 무엇보다 내부견제가 강력히 요구된다. 노조추천이사제를 운용함으로서 경영진에게 유리한 거수기 역할의 이사회가 아니라 금융공공성을 위해 의사결정의 투명성과 지배구조 개선 등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노조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버릴 필요가 있다. 추천이사제가 도입되면 근로자의 관점, 경험, 암묵지를 통해 생산성도 개선될 수 있다. 선입견을 가지고 시도조차 해보지도 않고 지레 겁이나 선을 그을 필요는 없다. 도입해보고 나서 그들이 우려한 상황이 발생되는지 지켜보면 될 것이다.
부작용이 많은 것으로 실체가 드러난다면 금융공기업의 경우 추후 제청을 고민하면 되고 민간금융사에서도 폐해가 많은 이 제도를 굳이 운용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는 잦아들 것이다. 실제로 근로자 편 이사가 노조만을 대변한다면 일반주주나 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기 힘든 것은 명약관화하다. 외려 지탄을 받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책은행인 기업은행에서의 선제적 테스트가 필요하다. 확산 여부는 그 평가에 따르면 된다. 안 해볼 이유는 없다. 무엇이 두려운가. 지키려고만 한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은 없고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견제와 투명한 노사 상생발전으로 더 큰 기업가치를 제고할지도 모른다. 어떠한 결과를 가지고 올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 공공적 특징이 있는 금융권에서는 타 산업에 비해 더욱 필요해 보이며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어설픈 열린경영·소통경영 코스프레보다 노조추천이사제 도입이 진정한 노사화합경영이다. 노동계는 이사회에 외부 추천 인물을 내밀면서 경영 의사결정 참여라는 새로운 권한이 생기지만 이와 동시에 조직 실적 개선이라는 책임 역시 부여된다.
근로자도 경영의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얘기다. 따라서 결정기구에 근로자를 대표하는 이사 한명쯤은 있어도 된다. 경영을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다. 경영자와 노동자가 조직의 성과에 공동으로 책임지는 문화가 정착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기업은행을 선두로 한 금융권의 노동계 이사 참여 시도가 꺼져가는 정부 의지에 불을 지피고 시중은행 등 전 금융권으로 파장을 일으킬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나마 간접 방식의 노조추천이사제가 성공적으로 안착된다면, 보다 갈 길이 멀어 보이는 노동이사제에 대한 거부감도 덜할 것이다. 아니면 그 반대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