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전이지만 드넓은 공간에 별다른 구획이 없다. 세 명의 작품은 그들의 뚜렷한 색채로 구별될 뿐이다. 신한은행이 장애예술작가의 창작지원을 위해 개최하는 그룹전 ‘감각의 섬’이 신한갤러리(강남구 역삼동)에서 지난달 개막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이선근, 이우주, 황성원 작가의 억척스럽게 벼린 작품들이 전시장이란 해양(海洋)에 개별적으로 부유하고 있다. 그 사이를 거닐다보면 미묘하게 닮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창작을 향한 고집이다. (CNB=선명규 기자)
서울문화재단과 함께 유망작가 소개
고집스럽게 작업한 세 명의 작품들
한 공간에서 각자의 색으로 구별돼
백미는 자연 다루던 작가의 자화상
겹겹이 걸린 실크 장막을 몸으로 훑고 들어가면 나란히 걸린 그림 세 점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양끝의 제목은 ‘영혼의 안정감’과 ‘평안’. 그 가운데를 ‘조화로움’이 받친다. 등장하는 일관적인 소재는 자연물. 작업할 때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우주 작가의 섬세한 터치를 받아 꽃과 이파리 같은 식물이 캔버스를 딛고 살아났다. 붓이 지나간 자리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섬세해 창작 과정의 고행이 보는 이의 눈에 선연히 전해진다.
단지 예단만은 아닐 것이다. 심지영 신한갤러리 큐레이터는 “이 작가는 집중력이 뛰어나다. 한 자리에서 대여섯 시간씩 작업에 몰두하는데, 큰 사이즈 작품의 경우 이렇게 서너 달이 걸리곤 한다”고 했다. 작업의 여정이 영상 되감기하듯 보이는 이유다.
자연물을 주된 소재로 삼던 것에서 변화가 인 것은 비교적 최근 일. 예컨대 전시장 모퉁이에 두 그림이 걸려있다. 머리를 곱게 묶은 소녀와 큼지막한 화관을 덮어쓴 소녀다. 상이한 모습을 한 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둘은 모두 이 작가 자신. 이번 전시에서 백미를 꼽으라면 자화상으로 관람객과 대면하고 있는 이 소녀들일 것이다.
따스한 파스텔톤 그림들을 건너면 극단의 대비가 강렬한 사진들이 기다리고 있다. 흑과 백, 어둠과 빛. 형체만으로는 그 대상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밤하늘에 뿌옇게 번진 구름 같기도, 고요한 연못을 스치듯 타고 넘는 물수제비 같기도 하다.
이처럼 정확한 실체 없이 추상적인 형태가 나타나는 까닭은 장시간 카메라 렌즈를 노출해 촬영하기 때문. 황성원 작가는 손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렌즈를 위로 향하게 한 후 사진을 찍는데, 몸의 움직임이나 사소한 흔들림조차 그대로 반영한다. 해가 설핏 남아 있는 순간의 흐름을 한 프레임에 지그시 담는다. 주로 새벽이나 해질녘에 작업한다는 그는 이 시간에 “어떤 화면을 마주하게 될지 두근거린다”고 했다. 황 작가의 사진들은 그 떨림의 기록이다.
‘창작의 섬’을 쏘다니는 여로는 이선근 작가의 작품 앞에서 잠시 닻을 내린다. 늘 정답처럼 받아들였던, 해본 적 없던 물음이 꼬리를 물어 정착하게 만든다. 가령, 명명된 색은 얼마나 폭넓을까? 검다는 것은 어느 범주까지일까? 나아가 특수한 도구로 대상을 문지르면 깨끗한 본연의 색이 알을 깨고 나오지 않을까?
어린 시절, 비가 세상을 적시자 전체적으로 한톤 짙어지며 선명해지는 경험을 했다는 이 작가는 이후로 줄곧 비 오는 날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 안에서 그가 쓴 색은 그 이름 그대로 작동한다. 이를테면 빨강은 빨강이고 초록은 초록이다.
몇몇 생생한 색상으로 작품을 완성해 짐짓 추상화 같지만 구상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이나 동물, 화살 같은 분명한 존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고 수수께끼 풀듯 어렵게만 접근할 일은 아니다. 이 작가는 “작품에 담고 있는 개념이나 메시지를 관람객에게 강요하거나 설명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자연스럽게 작품을 즐기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제언이다.
장애작가 창작의 장, 3년째 계속
올해로 세 번째다. 신한은행과 서울문화재단은 지난 2018년 문화예술 지원 협약을 맺고 잠실창작스튜디오에 입주한 장애예술인들의 전시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빼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으나 대중에 노출이 덜 된 작가들을 발굴해 작품을 선보일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심지영 큐레이터는 “전시 공간 제공뿐 아니라 도록 제작도 지원하고 있다”며 “이번 그룹전에 참여한 작가들이 올해 전시를 계기로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간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달 27일까지.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