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달항아리를 닮은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 사옥에 집(家)이 들어섰다. 방에 지붕까지 갖춘 완연한 가옥이다. 아모레퍼시픽의 럭셔리 뷰티 브랜드 설화수가 여는 설화문화전 ‘미시감각:문양의 집’은 주거공간이라는 익숙한 영역을 통해 한국의 전통문양을 선보이는 자리다. 낯설지 않은 표식으로 침실, 주방 등을 재구성했는데, 찬찬히 보면 숨어 있는 상징적 비밀을 알아챌 수 있다. (CNB=선명규 기자)
현대건축에 전통문양을 담아내
과거에서 영감 얻은 ‘새·꽃·나비’
4개 방에 각기 다른 콘셉트 등장
순백으로 지은 집을 향해 좁다란 길이 났다. 들머리까지 이어지는 길목에는 새하얀 반투명 천들이 매달린 채로 겹쳐 있어 시각적 파장을 일으킨다. 설원 같은 바탕에 얌전하면서도 일관적이게 새겨진 이미지는 눈의 결정. 이 상징은 설화수(雪花秀)가 주최하는 이번 전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암시이기도 하다.
내부에는 총 4개의 방이 마련됐다. 처음은 ‘리빙룸’이다. 안쪽으로 4인 가족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소파가 덩그러니 놓였다. 외피며 바닥, 하물며 천장과 벽에도 붉은 문양이 자수처럼 박혔다. 새, 꽃, 나비가 선연한 색으로 각인됐는데, 이 세 이미지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이 소장한 ‘호접도10폭병풍’에 등장하는 것들이다. 현대적 드로잉으로 재구성해 동시대의 생명력을 얻었다. 화려하고 신산한 색감 탓에 거실이라는 익숙한 공간이 야릇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다이닝룸’은 보다 생동감 있다. 실제로 움직인다. 기다란 식탁의 상판은 그 자체로 화면이다. 푸르스름한 물결이 잔잔히 요동치는 영상을 깊게 들여다보면, 수면 위를 부유하는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나비 등이 물과 가깝게 날며 파닥이는 날갯짓이 파고를 유발한다. 화면을 제외한 주변은 온통 백색이다. 공간을 구성하는 바닥, 천장, 도자기, 장식장 모두. 따라서 유일하게 발색하는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물이 품은 눅진한 내음이 더욱 농도 짙게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파우더룸, 시각효과 압권
침실의 본질은 역시 안락함일까? ‘베드룸’은 여러 의미에서 톤 다운(tone down)이다. 무엇보다 어둡다. 천장에서 조용히 몸을 늘어뜨린 천이 희미한 조명을 뒤에 두고 매달려 있다. 빛을 받은 그 위로 마치 그림자놀이 하듯 새떼가 지저귄다. 침대조차 세상에서 가장 진한 검은색이라는 ‘반타블랙’처럼 자신을 감추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존재를 숨긴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입체적으로 박힌 새들이다. 이 공간을 꾸민 구성요소의 모티브는 벽면에 자리한 ‘화조용모도10폭병풍’. 그림에 등장하는 고고한 새가 요란스럽지 않게 침실 곳곳에 날아들었다.
“어머! 너무 예쁘다!”
지난 20일 오후 ‘파우더룸’에 막 들어온 여성 네 명이 입을 맞춘 듯 동시에 같은 말을 뱉었다. 그들을 매료한 요소는 크게 두 가지. 깜깜한 ‘베드룸’을 금방 지나온 탓에 더욱 쨍하게 느껴지는 높은 럭스(lx)의 조명, 화장품들이 진열된 경대와 커다란 원형 거울이다. 거기에 하나 더 보태면 벽에 걸린 드레스까지. 미의 효과를 극대화한 패션과 뷰티 소품의 조합이 여심을 건드린 것이다.
집을 빠져 나오면 또 하나의 집이 움트고 있다. ‘라이브러리’다. 책을 쌓은 선반으로 틀을 잡아 집의 꼴을 만들었다. 내부에서는 전시 메이킹 영상이 상영 중이고, 관람객이 직접 문양 노트를 만들어 볼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14년째 이어온 메세나
‘설화문화전’은 설화수가 진행하는 메세나(기업의 문화 예술 후원)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설화수는 지난 2003년 ‘설화클럽’을 시작으로, 전통문화 후원을 위한 이 같은 활동을 14년째 이어오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 8명이 참여했다. 건축의 김이홍, 공간기획 박성진, 드로잉 강주리, 패브릭 김진진, 인테리어 백종환, 패션의 이다은과 조은애, 영상의 최경모 작가가 전통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일상 공간인 집을 새롭게 꾸며 선보인다.
설화수 MC 한민정 대리는 CNB에 “전통문양이 공예와 같은 한정된 예술 장르를 벗어나 대표적인 일상 공간인 ‘집’안에 적용된 사례들을 보면서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