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화웨이 제재를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전면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글로벌 IT업계의 ‘따돌리기’가 현실화되면서 화웨이가 존립 자체를 위협받는 위기에 내몰리자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해당 기업들은 화웨이와 다양한 방식으로 얽혀있어 이익과 손해를 가름하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CNB=정의식 기자)
화웨이는 경쟁사·협력사 ‘동전 양면’
반사이익 있지만 중국 보복 두려워
고래싸움에 새우될라 눈치보기 급급
지난 1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정보통신 기술 및 서비스 공급망 확보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중국의 거대IT기업 화웨이(Huawei)가 미‧중 무역전쟁의 핵심 이슈로 등극했다.
트럼프가 서명한 행정명령에는 미국의 국가 안보를 침해하고 미국 기업들의 기술 유출을 시도하는 타국의 IT 기업들과 미국 기업들의 거래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기존의 거래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거래를 시도하려면 미국 상무부에 허가를 신청해야 하고, 상무부와 재무부가 최장 6개월 간 심의를 거친 후 허가 여부가 결정되는데, 이는 사실상 거래를 하지 말라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졌다.
행정명령 발동 직후인 16일 윌버 로스 미 상무부 장관은 화웨이와 68개 자회사를 제재 리스트에 추가했고, 이로써 화웨이는 미국 기업들과 어떤 거래도 할 수 없는 처지로 몰렸다. 중국 상무부는 극렬 반발했고, 미‧중 무역협상은 무기한 연기됐다. 미국은 모든 동맹국들에게도 화웨이 제재 동참을 촉구했고, 호주와 뉴질랜드, 일본, 영국 등이 이에 호응하고 나섰다.
미국 IT기업들도 트럼프의 조치에 적극 호응했다. 지난 19일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퀄컴, 브로드컴 등이 화웨이와 맺은 각종 기술계약을 해지했다. 22일에는 NTT도코모, KDDI, 소프트뱅크 등 일본 이동통신사들이 화웨이의 스마트폰 발매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결정했고, 파나소닉이 화웨이에 부품공급 중단을 발표했다.
주요 IT기술 표준단체들도 화웨이 제재에 동참했다. 26일 애플, 퀄컴, 브로드컴, 인텔 등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무선기술 표준단체 ‘와이파이 연맹(Wi-Fi Alliance)이 화웨이의 참여를 ’잠정 제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퀄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도시바 메모리, HP, 시스코 등이 회원인 반도체 기술 표준단체 JEDEC도 미국 정부의 제재가 풀릴 때까지 화웨이의 회원 자격을 정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SD메모리카드 표준단체 SD협회도 화웨이를 배제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역시 구글과의 계약 해지였다. 구글은 화웨이에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와 지메일, 유튜브, 크롬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구글과의 계약이 중단되면서 화웨이는 기존 스마트폰의 OS 업데이트 불가, 신규 출시 폰 구글 OS 사용 불가, 플레이스토어 설치 불가 등의 난관에 처하게 됐다.
또, 퀄컴, 인텔의 AP‧모뎀 칩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면서 화웨이는 기린(KIRIN) 등 자체 AP와 모뎀 칩만으로 스마트폰을 생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반사이익? 속없는 소리
이처럼 화웨이에 대한 제재가 현실화되자 업계에서는 삼성전자를 비롯한 몇몇 기업이 ‘화웨이 사태’의 반사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미 경제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24일(현지시간) “화웨이를 거래제한 기업으로 지정한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이 스마트폰 시장의 절대강자 지위를 유지하려는 삼성에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삼성이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의 정상에 올라 있지만 화웨이의 부상으로 최근 그 위치가 위협받아왔다”며 “화웨이는 내년까지 자체 개발한 스마트폰 OS가 준비될 거라고 하지만 소비자들이 새롭고 잘 알려지지 않은 OS에서 작동하는 화웨이 스마트폰을 사려할 지 보장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도 27일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에 대한 미국 정부의 거래 제한 조치는 삼성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입지를 강화할 기회”라며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시스템에 대한 접근권 상실이 화웨이의 중국 외 지역 스마트폰 판매에 상당한 타격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피치는 “영국과 일본 업체들이 화웨이의 5G 스마트폰 출시를 연기한 점도 단기적으로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매출 신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삼성‧LG전자 “화웨이는 경쟁사이자 협력사”
하지만, 정작 수혜주로 거론된 삼성전자와 LG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IT대기업들의 표정은 밝지 않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조심스레 ‘줄타기’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태생적 약점 때문이다.
우선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화웨이와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어 삼성전자, 오포, 비보, 샤오미 등 다른 경쟁사들과 함께 반사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스마트폰 외의 시장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삼성전자의 올 1분기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화웨이는 애플, AT&T, 도이치텔레콤, 버라이즌 등과 함께 5대 대형 매출처에 속한다. 5대 기업의 매출 비중은 삼성전자 전체 매출의 약 15% 정도다.
중국 시장과의 관계도 변수다. 화웨이가 중국을 대표하는 IT기업인 이상, 자칫 미운털이 박혔다간 중국 소비자들에게 외면당할 수 있다. 삼성전자 전체 매출 약 244조원 중 17.7%인 약 43조원이 중국 매출이다.
LG전자는 화웨이나 중국 시장을 대상으로 한 매출 비중이 크지 않다보니 반사이익도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LG전자의 지난해 전체 매출 61조3417억원 중에서 중국의 비중은 3.9%(2조3694억원) 정도였다. 그 외 화웨이 스마트폰에서 LG전자 스마트폰으로 수요 이동도 낮을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미 5G 이동통신망 구축에 화웨이의 장비를 사용 중인 LG유플러스가 난감한 입장에 처했다는 것. 최근 미 국무부 관계자가 국내 외교부를 통해 화웨이 장비를 사용하는 LG유플러스가 한국 내 민감한 지역에서 서비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자칫 LG유플러스가 ‘세컨더리 보이콧’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최근 중국 매출 비중이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어 상황이 더 심각하다. 올 1분기 매출 6조7700억원 중 절반 가까운 3조1600억원(47%)이 중국 시장에서 발생했다. 게다가 SK하이닉스는 우시와 충칭에 생산라인을 운영하고 있고, 현지 자회사만 13개에 달한다. 트럼프의 제재가 SK하이닉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외에도 화웨이 제재에 영향받는 기업은 많다. 업계에 따르면, 화웨이는 국내 기업들로부터 연간 약 12조6000억원에 달하는 규모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카메라 모듈 등 각종 부품을 공급받는다. 반도체는 SK하이닉스, 디스플레이는 삼성디스플레이, 카메라 모듈은 LG이노텍이 가장 큰 거래처다.
적지 않은 규모지만 전문가들은 화웨이 제재로 인해 우리 부품업체들이 입을 피해보다는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스마트폰 제조사들의 반사이익이 더 클 것으로 예상하는 분위기다.
김민경 신영증권 연구원은 “화웨이에 부품을 공급하는 업체는 대부분 중국 업체로 국내 업체의 점유율은 미미하다”며 “삼성전기, LG이노텍 등도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다”고 분석했다. 그는 “유럽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던 화웨이가 타격을 받아 삼성전자, LG전자 등의 반사수혜가 기대된다”고 봤다.
(CNB=정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