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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관심의 사각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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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선명규기자 |  2019.05.23 11:52:22

사진=픽사베이

열네 살 민주는 초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곧잘 했다. 과학과 수학을 특히 잘했다. 얼마나 잘했던지 장관이 주는 상도 받았다. 친구들과 사이가 좋아 학급 반장도 했다. 영민하고 친절한, 나무랄 데가 없는 학생이었다. 그런 민주가 중학교에 입학한지 나흘 만에 덜컥 선포를 했다. “자퇴를 하겠다”고. 늘 종잡을 수 있던 딸의 파격적 선언은 부모에게 도무지 요령부득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왜?

민주의 엄마는 깊어가는 시름을 지난달 방송된 KBS2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서 풀어놨다. “(딸이)중학교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며 카메라 앞에 섰다. 민주에 대해 들은 시청자들도 납득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오해도 했다. 요즘 일찍이 자퇴하는 연예인들이 많고 그 모습이 쿨해 보여서 어린 가슴에 바람이 들었나 했다. 하지만 민주가 내세운 나름의 계획에 금세 방청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빡빡하게 짜인 홈스쿨링 일정은 공부가 싫어 학교생활을 포기하려 한다는 오해를 뒤집기에 충분했다. 전혀 공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먼 미래의 모습도 그려 놨다. 그 길에는 민주의 두 살 터울 오빠가 있다. 오빠는 지적장애 1급이다. 밥도 먹여줘야 하고 대소변도 가려줘야 한다. 하루에 열 번 넘게 경기를 일으키는 탓에 누군가 옆에 있어줘야 한다. 생업에 바쁜 부모를 대신해 민주가 오빠 곁을 지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몰래 냉가슴을 앓았을까? 유난히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하얀 피부를 가진 아이는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아"

그 길 끝에 있는 궁극적 목표는 특수학교 교사라고 했다. 오빠와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특수학교 담당 교사를 보고 진로를 정했다고 한다. 그 꿈을 이뤄 남에게 상처주지 않는 훌륭한 교사가 되길 바란다고, 속으로 응원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신동엽의 고백을 듣고선 소녀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장애가 있는 형제와 살면서 느낀 게 있다. 아무래도 장애가 있는 형제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애써 아닌 척 하지만 서운함이 남는다." 과연 민주는 괜찮을까? 지금도, 앞으로도.

이 말에 지난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활엽수 흐드러진 경의선 광장 근처였다. 한 대기업에서 CSR을 기획하는 이와 밥상을 두고 마주앉았다. 과거 100개 기업의 사회공헌 사업을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한 것이 연이 됐다. 이날 나온 쌀밥은 희었고 곁들인 찬들은 파릇파릇했다. 나는 밥풀을 튀겨가며 사회문제에 대해 실컷 알은체했다.

하지만 잠자코 듣던 그가 툭 던진 말에 더 이상 밥알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지 않았다. “보통 장애아동에는 관심이 많죠. 그런데 그들의 비장애형제가 어떤 고충을 안고 사는지 아세요? 몇 명인지도 모르죠? 통계에도 안 잡혀요. 그만큼 무관심해요.”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복지 사각지대가 많이 해소되고 있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단정지은 알량한 말과 글이 떠올라 식탁 밑으로 고만 숨고 싶어졌다. 사회문제를 홑겹으로 인식한 채 공연히 드러낸 무식이 부끄러웠다.

사회는 장애가 있는 당사자만 도우면 된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확장하면 부양의 책임이 있는 부모까지 만이라고 한정지었다. 형제자매는 배제한 채 가족집단을 한 겹으로 규정지었다. 한 명의 사정을 모두가 끌어안는 게 식구라는 걸 망각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실수가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나는 믿는다. 다신 이런 불면을 일으키는 허튼 짓은 하지 않으리라, 얼치기 윤똑똑이는 되지 않으리란 다짐이 결함으로 가득한 인간을 메워준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부채를 탕감하듯, 장애가 있는 형제를 둔 이들에게 어떤 고충이 있는 지 들여다볼 참이다. 벙어리냉가슴앓듯 숨죽여야했던 사연에 귀 기울여 보려 한다. 마침 그때 내게 일침을 준 이가 몸담은 기업에서 장애청소년의 비장애 형제들을 위한 지원책을 논의 중이라고 하니 훗날 참고가 될 듯하다.

그전에 할 일이 있다. 주변에 얼마나 많은 민주가 있는지 헤아리는 것이 우선이다. 숫자가 나와야 사람들이 실감한다. 몇 명인지는 유관 기관이 들여다보고 세어주길 바란다. 어렴풋이 추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면, 정확하고 신랄한 통계의 힘을 빌려 관심의 사각지대를 비추겠다.

(CNB=선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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