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승점으로 가는 반환점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다. 올해로 창립 51주년을 맞은 포스코가 여는 ‘人, 사람의 길을 가다’전(展)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백년기업(百年企業)을 향한 재도약의 원년 기념’이 기획 취지. 길잡이는 뜻밖에도 과거로부터 길어 올렸다. 조선시대 현인들의 경구와 선조들의 나라, 부모를 향한 성심이 담긴 그림으로 현시대를 비춘다. 시대에 관계없이 새겨듣고 들여다볼만한 유산들이 쏟아져 나왔다. 전시가 진행 중인 서울 대치동 포스코 미술관을 지난 7일 찾았다. (CNB=선명규 기자)
‘과거’에서 ‘미래’ 찾는 포스코
거사의 의미 ‘안중근 유묵’ 등
돌아볼만한 작품들 대거 나와
여덟 자가 결연한 필치로 새겨졌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 成事在天)’. 글의 말미에는 짧은 약지가 인상적인 손바닥 문양이 인장처럼 찍혔다. 주지하다시피 이 휘호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한 달 전에 남긴 것이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되고 안 됨은 하늘의 뜻에 달렸다’는 뜻처럼 문체에서 바위 같은 단단한 기운이 전해진다.
이번 전시에는 안 의사의 유묵을 비롯해 정조대왕의 친필 축시, 추사 김정희의 수묵화, 백자대호 등 좀체 보기 힘든 유물들이 대거 나왔다. 80여점의 작품을 그러모은 기준은 크게 세 가지. 의(義), 렴(廉), 애(愛)다. 확고한 소신으로 ‘사람의 길’을 먼저 간 선조들의 행적을 되짚어보고, 그 발자취를 지금에 투영해보면 감상의 깊이가 더해진다.
의연한 문장 옆 화폭에서는 난데없는 술판이 벌어졌다. 참석자는 양복 입은 사내들과 드레스 입은 여성, 그리고 도포 차림의 한 남성이다. 식탁 위에 술병과 잔이 나뒹굴고 한 양복쟁이는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뻗어버렸다. 창밖에는 강물이 헌걸차게 흐르고 있다.
언뜻 자연에서 풍류를 즐기는 한량들 같지만 속내가 있다. 홀로 복장이 다른 남성은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참석을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조선 왕의 특명 전권공사 민영환. 장소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네바강변의 누각이다.
안중식이 그린 이 그림에서 민영환은 혼자 술을 들이켜고 있는데, 부국강병에 뜻이 있던 그에게 러시아에서 목격한 신식 군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귀국해 군제 개편을 건의하지만 성사되지 못하고, 훗날 일제 침략에 항거해 자결한 행보를 보면 이 작품이 결코 한가로운 술판으로 읽히지 않는다. 거푸 들어 올리는 술잔에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선생의 심려가 담겨있었으리라.
전시장에는 글귀로 이뤄진 작품이 많이 나왔는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주변인을 위한 왕의 헌사다. ‘장주공(홍용한) 회갑 축수 칠언율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정조의 ‘애(愛)’. ‘붉은 비단옷에 하얀 머리 육순의 노인’으로 시작하는 짧은 노래에는 문신 홍용한의 아손까지를 아울러 축복하는 글자들이 하나하나 눌려 담겼다. 이름난 서화가이기도 한 정조의 수려한 글체도 놓쳐선 안 되는 감상 포인트다.
선비들의 유쾌한 일상…보는 재미 더해
묵직함 일색은 아니다. 전시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선비사상’이다. 조선시대에 학식과 신념이 있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들도 내걸렸다. 선비들의 진지함을 덜어내고 그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그림이 특히 흥미롭다.
그중 가벼운 과시욕이 담겨있는 ‘고사인물도’가 재미있다. 붉은 옷을 입고 오른손에 붓을 든 남성이 큰 창문 앞에 앉아 종이를 펼쳤다. 일필휘지로 글을 적어내려가기 직전이다. 창밖 연못에서는 거위가 유영하고 있고 주변 나무와 수풀은 적당히 우거졌다.
여기까진 뻔하고 흔한 구도로 여겨지겠으나 반전이 있다. 한쪽에 책을 선반 삼아 무심히 올려놓은 ‘필통’은 요즘으로 치면 ‘명품’이다. 중국에서 유행하는 고가의 도자기에 붓들을 아무렇지 않게 꽂아 놔서 눈에 덜 띈다. 소셜미디어에 자랑하고픈 것들을 카메라 앵글 구석에 놓아 살짝 드러내려는 요즘 심리와 비슷하다. 관재 이도영이 그린 이 작품은 조선판 ‘허세샷’인 셈이다.
이번 전시는 풍성한 볼거리가 특징이다. 조선시대 서화와 도자기 등 작품뿐 아니라 학식을 쌓고자 하는 이들이 썼을 법한 벼루 등의 소도구를 살펴보는 맛도 있다.
포스코 미술관 관계자는 CNB에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달 항아리 등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국보급 유물들을 통해 선비사상의 정수를 느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28일까지.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