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이 소망을 비는 장치 중 하나는 민화(民畫)였다. 부귀, 장수, 다산 같은 바람을 그려 나타낸 것이 민화의 한 형태다. 롯데백화점이 잠실점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지난 10일부터 열고 있는 ‘백수백복-조선시대 민화전’은 화폭을 통해 복은 부르고 액운은 쫓으려는 선조들의 염원을 담았다. 한 해의 무탈함과 평안을 희망하는 때인 지금 보면 좋을 전시. 복을 바라는 다분히 민중적인 정서들이 들어찬 현장을 지난 15일 찾았다. (CNB=선명규 기자)
액운을 막는 호랑이의 날선 결기
출세·부귀 담은 수백년전 그림들
새해 염원 그날의 민화에 담긴듯
날선 표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는데 위압감이 대단하다. 대호(大虎)의 몸통이 병풍 6폭에 비좁게 나뉘어 담겼다. 펼쳐진 얼룩무늬 가죽이 장대하다. 우매한 밤손님이 함부로 찾았다간 혼비백산할 지경이다. 예로부터 잡귀를 쫓는 액막이 역할을 한 호랑이가 등장하는 호피도(虎皮圖)의 위용은 사뭇 위엄하다.
‘복을 바라나이다’. 전시장 입구와 가까운 벽에 이 같은 금색 문구가 붙었다. 길운을 들이기 위해선 나쁜 기운을 막는 것이 먼저. 호피도와 함께 선보이는 호작도(虎鵲圖)는 보다 유쾌한 인상의 방패막이다.
잔뜩 벼려진 이빨, 부릅뜬 눈에서 나오는 안광이 형형한 호랑이가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아 있다. 그런데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있는 나무 위 까치가 이를 비웃듯 내려다보고 있다. 지상의 기세등등한 지배자를 조소하는 듯한 눈빛이다. 먹이사슬에 아랑곳없는 출연진의 익살스런 구도가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공포의 대상이지만, 해를 막아주는 영험한 짐승이라 믿은 호랑이를 친근하게 표현해 유쾌하다.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조선시대 민화는 20여점. 개인의 소망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각 작품마다 서로 다른 바람이 서려있다. 전체 작품 수는 적지만 저마다 의미가 있어 하나씩 눈여겨 봐야한다.
부귀(富貴)에 대한 갈망은 한 떨기 꽃에 담았다. ‘꽃 중의 왕’으로 불리는 모란이다. 모란도(牡丹圖)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따사로운 색감을 내비쳐 고귀하다. 붉지만 강렬하지는 않은, 백색과 분홍 사이에서 배회하는 모란의 자태가 고고하다. 모란이 임금을 상징한다고 하니 높게 쌓인 부와 높은 신분을 모두 표현하기에 차고 넘치는 소재다.
누군가 길상(吉祥)을 관장한다면 그 모습이 결코 평범할 리 없다. 용이라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대대로 용이 뜻하는 바는 장원급제, 입신출세, 만사형통 등으로 스케일이 남다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운룡도(雲龍圖)는 용이 구름 사이를 유영하는 그림으로, 오복(五福)을 가져다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새해 첫날 대문에 붙이는 문배(門排)에 주로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 들머리에서 길한 기운을 들이는 안내자인 셈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전용건(72)씨는 “유유히 비행하는 용이 신비롭게 느껴진다”며 “(운룡도의)좋은 기운을 받아 올해는 집안에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관람객의 발길이 오래 머무는 작품을 보면, 현대인들의 바람 중에서도 우선순위가 읽힌다. 출세를 뜻하는 화조도(花鳥圖), 장수의 열 가지 상징을 8폭 병풍에 담은 자수십장생도(刺繡十長生圖), 가정의 평안을 바라는 서수도(瑞獸圖)에 특히 고정된 시선이 많았다.
화조도에서 유난히 눈을 못 뗀 취업준비생 김은지(28)씨는 “올해는 꼭 원하는 직장에 입사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간명한 문자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도 있다. 병풍 8폭에 유교 덕목을 담은 제주도문자도(濟州島文字圖)다. 1폭에 효자(孝子), 2폭에 충신(忠臣), 3폭에 인의(仁義), 4폭에 예지(禮智), 5폭에 붕우(期友), 6폭에 유신(有信), 7폭에 최낙(最樂), 8폭에 행선(行普)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귀담아 들으면 언제든 이로울만한 말들이 새겨져 있다.
조의영 롯데백화점 문화마케팅팀 큐레이터는 CNB에 “계층에 상관없이 누구나 갖고 있는 염원을 표출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민화 같다”며 “새해에 이번 전시를 보면서 소망을 빌어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백수백복-조선시대 민화전’은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티뷰엘 아트홀에서 이달 10~28일, 롯데백화점 영등포점과 안양점에서 다음달 1~24일 열린다. 관람료는 무료.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