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산업 중의 하나이자 국민 건강의 영원한 동반자다. 최근에는 신약개발 열풍이 불면서 우리 경제에 활력을 주고 있다. 제약사들이 장수한 배경에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역대급’ 제품이 있었다. 이에 CNB는 수십년 세월 서민과 함께 해온 ‘효자제품’들을 취재해 <연중기획>으로 연재하고 있다. 추억을 돌아보고 건강을 챙기는 데 작은 도움이 되고자 함이다. 아홉 번째 이야기는 동성제약의 ‘정로환’이다. (CNB=김유림 기자)
세월 흘러도 여전한 국민 지사제
‘배탈 설사엔 정로환’ 역대급 광고
한약재 냄새 뺀 새 정로환 ‘시즌2’
가을이 깊어가면서 낮과 밤의 온도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 이 시기에는 여름철보다 식품 위생 관념이 느슨해지면서 유독 배탈이 나는 사람들이 많다. 또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가 우리 몸의 면역력을 떨어뜨려 배앓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복통을 수반하는 보통 설사에 시달리는 경우 가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상비약은 1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정로환’이다. 워낙 역사가 오래된 덕분에 ‘배탈에는 정로환’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도 있지만, 2003년 미국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받았을 정도로 검증된 약이다. FDA는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결정에 따를 정도로 의약품에 대해 가장 엄격하고 신중하게 관리 및 시판하는 승인 기관이다.
정로환은 사실 1905년 일본에서 탄생했다.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 파병 간 일본 군인들은 나쁜 수질로 인해 설사병에 시달리다가 죽어나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만든 약이 다이코신약의 ‘정로환’이다. 정로환은 정신없는 전쟁통에 강력하고 빠른 효과를 발휘했고, 결국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됐다.
▲동성정로환 과거제품 조합. (사진=동성제약)
현재 국내에는 익수정로환, 태준대행정로환당의에이, 솔표정로환 등 여러 종류의 정로환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원조는 ‘동성제약’의 제품이다. 한국에 정로환이 정식으로 등장한 스토리는 동성제약의 창업주 이선규 명예회장의 약업인생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60년대, 우리나라는 광범위한 영양실조와 배탈이 국민병일 정도였다. 음식물의 흡수가 충분치 못한 상태에서 설사로 영양을 상실하게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콩보다 작은 정로환 몇 알만 있었어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지만, 국내 제약사 중 정로환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곳은 없었다.
반면 당시 일본은 정로환을 가정상비약으로 가지고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상황이었다. 이에 이 명예회장은 ‘정로환’을 국내에서 생산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일본 정로환의 성분 표시를 보고 그대로 제조했으나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 명예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에 직접 건너가 다이코신약으로부터 정로환 제조 기술을 직접 배워왔고 1972년 봄, 동성정로환(正露丸)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동성정로환을 향한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국내 제약사들은 앞다퉈 유사제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에 이 명예회장은 여름철 마케팅에 집중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피서를 즐기기 위해 해수욕장을 방문한다. 지금은 식수환경이 좋아졌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낯선 곳에서 물을 바꿔 먹을 경우 배탈이 흔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광고 카피는 ‘배탈 설사엔 정로환!’이다. 그 결과 1972년 정로환은 단일 제품으로만 약 50억원의 매출을 올렸으며, 동성제약이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줬다. 어머니들은 자식이 배탈이 나면 정로환 몇 알을 들이키게 했고, 이때부터 ‘엄마 손’은 ‘진짜 약손’이 되었다.
이후 1980년대 들어서면서 동성정로환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정로환은 생약이 주성분이기 때문에 한약재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이 때문에 어린 아이나 젊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성제약은 이를 개선해 1988년 정로환 당의정을 만들어 낸다. 당의정은 정로환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약 표면에 코팅처리를 한 제품. 덕분에 냄새에 민감한 사람들도 편하게 복용할 수 있게 됐다.
동성제약 관계자는 CNB에 “정로환은 1972년 출시 이후 50년 세월 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탈설사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지금도 동성제약의 매출을 책임지고 있는 효자제품”이라며 “개선된 생활환경으로 배앓이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해외여행 등 낯선 환경에서의 배탈을 염려해 정로환을 챙기는 이들이 많다. 변화하는 현대인의 특성에 맞춰 연구개발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CNB=김유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