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단어는 ‘먹다’이다. 이 동사가 미치는 범위는 실로 방대하다. 일찍이 이어령은 ‘한국인은 무엇이든지 먹는다’고 했다. “새해가 되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나이도 한 살 더 먹는다. (중략)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무엇이든 먹을 수가 있다”고 석학은 <디지로그>에 적었다. 우리의 삶은 먹으면서 이어진다.
복합적 의미인 ‘먹다’가 뒤집어지면 ‘굶다’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삶의 연속을 깨트릴 수 있는 무시무시한 뜻이 된다. 참으로 비참한 말이다. 미용 목적 같은 고의도 힘들겠지만, 불가항력이라면 그 참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위장이 비면, 서슬 퍼런 고통이 저 안에서 피어난다. 누구나 느끼는 공평한 감각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잠깐이라도 앓아봐서 안다. 성인도 참기 힘든데 어린 아이들은 오죽할까라는 것도 안다. 천사의 심성을 지니지 않았더라도 연민이란 감각을 통해 받아들여진다. 그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아이들을 보며 느끼는 감정에 대한 적확한 표현을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단지 무력, 분개, 절망 같은 단어로 겨우 뭉뚱그릴 뿐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결식 우려 아동’으로 지정돼 지방자치단체에서 급식 지원을 받은 18세 미만 아동은 33만2865명이다. 전체 아동 인구 896만1805명(2015년 기준) 가운데 3.7%에 해당하는 수치다. 100명 중 4명은 도움이 없다면 밥을 굶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아픔인 허기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다.
이것은 ‘쌍팔년도’ 얘기가 아니다. 드론이 날아다니고, 말로 전자기기를 제어하고, 4차산업혁명이 일어난다는 오늘날 일이다. 낯설어도 현실이다.
그동안 기업들의 사회공헌을 다루는 [문화가 경제]를 연재하면서 ‘나눔사업’에도 트렌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령 국가적 스포츠 행사가 있으면 체육계 지원으로 쏠렸다가 다문화 정책을 강화한다고 하면 다문화 가정 지원으로 몰리는 식이다. 여하튼 사회에 이바지한다는 취지에서는 박수 보낼 일이지만, 유행 타는 것 같아 어쩐지 농도가 옅어 보일 때가 있다.
사회공헌 활동에 트렌드와 클래식이 있다면 ‘결식아동 돕기’만큼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전통에 들어갔으면 한다. 위장의 곤궁은 드러나기 어렵다. 살펴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다. 감춰져 있다. 한 두 차례 채워졌다고 평생 배부를 리도 없다. 그러니 ‘먹다’는 끊겨선 안된다. 늘 주목받아 마땅하다. 시대가 바뀌어도 먹어야 산다. 그래야 나이를 먹는다. 그게 삶이다.
(CNB=선명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