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한미정상회담 경제인단 구성에서 전경련이 별 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자, 전경련 따돌림이 문재인 대통령의 사심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문 대통령이 28일 미국 워싱턴 헤이 아담스 호텔에서 열린 경제인단 차담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오른쪽)과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풍부한 민간외교 경험을 바탕으로 재기를 시도했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여전히 찬밥 신세다. 한미정상회담 경제인단을 꾸리는 과정에서 역할이 축소되면서 사실상 ’왕따‘를 당했다는 주장과 ‘경제단체들의 역할 범위가 넓혀지면서 자연스럽게 도태된 것’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진실은 뭘까. (CNB=손강훈 기자)
野 “방미단 구성 文 코드에 맞춘것”
대한상의 “시장논리에 따른 선정”
기업들 “전경련 스스로 자초한 결과”
과거 정권들은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마다 전경련을 적절히 활용해 왔다. 전경련이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민간외교의 핵심 역할을 해온데다 끈끈한 국제협력 민간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경련은 이번 기회를 반전의 카드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번 회담의 목표가 보호무역 강화, 한미FTA 재협상 등 미국의 통상압력을 완화시키는 데 있다는 점에서 전경련 역할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임명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었다는 점도 전경련의 몸값이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에 힘을 보탰다.
전경련 역할론은 이달 들어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대한상의가 전경련 측에 대통령 방미 시 동행한 기업 10여 곳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다.
전경련의 ‘미국 네트워크’는 상당히 탄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은 미국상공회의소와 함께 1988년 ‘한미 재계회의’를 설립해 양국간 주요 경제현안을 논의해 오고 있다. 지난달에는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를 비롯해, 현대차, 포스코, 롯데케미칼, 효성, 삼양 등이 포함된 경제사절단을 미국에 파견, 현지 기업인들을 만나 한미FTA의 정당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전경련은 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경제인 모임인 ‘BICA’ 등 다자회의에도 한국 대표로 참여 중이며, 중국·일본 등과도 매년 재계회의를 열고 있다.
하지만 지난 23일 발표된 한미정상회담에 동행할 52명의 기업인 명단을 보면 ‘전경련 역할론’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방미 경제인단은 최태원 SK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구자열 LS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구본준 LG그룹 부회장,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신현우 한화테크윈 대표이사 등 10명의 대기업 총수를 비롯해 박인구 동원그룹 부회장, 김보곤 디케이주식회사 대표이사 등 중견기업 14명, 중소기업 23명, 공기업 2명, 미국계 한국기업 2명으로 구성됐다.
이중 전경련 회장단은 허창수·박정원·조양호 회장 3명뿐이다.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 허 회장은 전경련이 아닌 GS그룹 총수 자격으로 미국에 가게 됐다. 박 회장과 조 회장 역시 전경련 직함이 아닌 두산과 한진의 총수 자격으로 방미길에 오른다.
특히 대한상의가 전경련에 요청했던 기업추천의 경우, 전경련 뿐 아니라 중소기업중앙회·한국무역공사·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등 대부분 경제단체에게도 전달된 형식적인 절차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경련 관계자는 CNB와의 통화에서 “방미 경제인단과 관련해 전경련에서 준비한 것은 없다”며 “미국을 가는 회장단의 경우 각자 그룹 차원에서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방미 경제인단은 미국과 경제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기업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제임스 김 한국지엠 사장 겸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 박성택 산하 대표이사 사장 겸 중소기업중앙회장, 구본준 LG그룹 부회장.(사진=연합뉴스)
대한상의 “청와대 외압 말도 안 돼”
이런 상황을 두고 일각에서는 전경련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현 정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문재인 정부가 방미 경제인단 구성을 대한상의에 일임하긴 했지만 청와대의 눈 밖에 난 전경련 회원 기업들이 외압에 의해 배제됐거나, 청와대의 의중을 알아차린 대한상의가 알아서 일부 기업을 제외했을 가능성이다. 자유한국당 등 일부 야당을 중심으로 방미 경제인단 구성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상황이다.
한 야당의원은 “미국과 관련 없는 업체가 순방단에 선정되고 여당의 지역위원장이라는 이유로 특정 업체가 포함됐다는 기업인들의 불만이 들린다”고 비판했다.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전경련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조력자였다는 ‘원죄’가 있다. 새 정부 출범 후 재벌개혁이 적폐청산의 핵심과제로 부상한 상태다.
하지만 대한상의는 외압은 없었다는 입장이다. 과거 특정단체에게 무조건 대통령과 동행하는 기회를 주던 관행을 버리고, ‘미국 관련 투자나 교역, 사업실적, 사업계획, 첨단 신산업 분야 협력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경제인단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시장주의에 입각, 미국과 경제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기업으로만 꾸렸다는 얘기다.
실례로 미국에 공장건설을 예고한 삼성과 LG전자, 오는 2021년까지 31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현대차그룹은 미국행에 몸을 실은 반면, 참가를 희망했던 포스코와 KT의 경우 현재 미국에서 진행하는 구체적인 사업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또한 허창수 전경련 회장에게 GS그룹 대표자격으로 참여시킨 것도 다른 기업들과 형평을 맞췄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실례로 박성택 중소기업중앙회 회장 역시 자신이 경영하고 있는 회사인 산하 대표이사 사장 자격으로 참여한다.
전경련 자체가 경쟁력을 잃었다는 의견도 있다. 4대그룹(삼성, LG, 현대차, SK)과 포스코 탈퇴 등으로 규모와 힘이 크게 줄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CNB에 “미국의 통상압력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양국 경제관계 개선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며 “이를 위해 과거 관행들은 과감히 버리고 기업 중심으로 경제인단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경제인단에는 허창수·박정원·조양호 회장 등 3명의 전경련 회장단이 포함됐지만 각각 GS·두산·한진그룹 총수 자격으로 참가한다. (사진=연합뉴스)
“전경련, 새정부 시장논리에 어긋나”
한편 재계에서는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도 전경련의 존재감이 사라지면서 재계 대표 무게추가 대한상의로 급격하게 기운 것으로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은 후보시절인 지난 4월 대한상의 초청 강연에 참석해 “전경련의 시대는 갔다. 대한상의가 건설적인 경제협력 파트너가 될 것”이라며 대한상의에 힘을 실었고, 정부 출범 후 인수위원회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지난달 8일 재계 첫 만남을 대한상의와 가졌다.
대한상의는 문 대통령 1호 정책인 일자리위원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지난 23일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4대그룹의 간담회도 대한상의가 주도했다.
이번 미국행 역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두산인프라코어 회장)만이 주관단체라는 이유로 유일하게 재계단체 소속으로 참여하는 등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런 변화를 문 대통령과 전경련이 코드가 맞지 않아서라기보다는, 새 정부가 시장중심 논리를 강조하고 있는데 따른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CNB에 “문재인 대통령이 전경련에 특별한 사감(私感)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전경련 스스로 정경유착 등 시장논리에 반하는 행동으로 위상을 떨어트린 측면이 더 크다”며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재벌이 시장주의에 끼치는 폐해를 전경련 스스로 개혁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CNB=손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