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난리가 난 장면이 있었다. 해당 장면에서 한 선생님이 성석순으로 책상에 앉으라고 했고, 학생들은 인권유린이라고 난리가 났다. 꼭 드라마뿐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저런 일이 벌어지면 사회적으로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일이 행해지는 곳이 있다. 바로 ‘프로듀스 101 시즌2’(이하 프듀2) 현장이다.
애초에 이 방송은 순위가 주요 콘셉트다. 연습생 101명의 첫 등장부터 그렇다. 1부터 101까지 숫자가 쓰인 의자에 자신의 예상 순위대로 앉게 했고, 평가를 통해 A부터 F까지 반을 나눴다. A등급을 받은 연습생들은 에이스, F등급을 받은 연습생들은 열등생으로 여겨진다. 그래도 차라리 A등급이나 F등급이 나았다. 나중엔 이 사이에서도 등수가 갈린다. 결국 같은 A등급의 에이스라 해도, 그 사이에서도 또 1등이 존재하고, 1등에 밀린 2등이 존재한다. 또 가장 경악스러운 건 연습하거나 하물며 리허설을 할 때도 연습생들의 몸에 등수를 크게 적어 놓는다는 것. 마치 낙인 같다.
시즌1에서 꽃다운 소녀들, 그리고 현재 시즌2에서 패기 넘치는 소년들의 모습 속 이 순위는 열정의 표상인 양 포장되고 있다. 하지만 순간순간 소름 끼치는 장면들이 있다. 발군의 능력을 지닌 연습생 하성운은 ‘네버’팀에서 자신의 몸에 적힌 순위를 보고 주눅 드는 모습을 보였다. 본인을 제외하고 모두 10등대의 높은 등수라며, 꼭 자신이 가장 모자란 연습생인양 고개를 떨궜다. 사실 과거 평가에서 안정된 춤과 노래 실력으로 A등급을 받았던 것은 본인뿐이었음에도 말이다.
박지훈은 1위 후보로 가장 많이 오른 연습생임에도 불구하고 3차 순위 발표식에서 “자신감이 점점 떨어진다”고 말했다. 항상 1위를 기록하다가 처음으로 3위에 올랐을 때 1위에서 밀렸다는 이유로, 그의 등수에 수많은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마치 1위에 오르지 못한 것이 잘못인 것처럼. 이뿐만이 아니다. 콘셉트 평가 때는 굳이 중간에 순위 발표를 해 순위에 오르지 못한 연습생들이 방출되고, 이후 살아남은 연습생들 자체 내에서도 스스로 팀원을 방출하게 시키기도 했다.
순위가 연습생들 사이 선의의 경쟁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반적인 방송의 흐름을 보면 오히려 연습생들 자체를 보기보다는 순위를 위주로 그 사람을 보게 되는 안타까운 면이 크다. 그리고 이건 상위권, 하위권 연습생들 모두에게 다르지 않다. 강다니엘, 박지훈, 옹성우, 박우진, 안형섭, 김사무엘까지 상위권 연습생들로 구성된 ‘겟 어글리’팀이 연습시간에 등장했을 때 트레이너들은 춤도 보기 전에 “순위 뭡니까” “이건 ‘어벤져스팀’이 아니라 ‘가디언즈 오브 오브 더 갤럭시’ 팀”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보인 춤이 만족스럽지 않자 차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물론 기대만큼, 받는 사랑만큼 부응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상위권은 ‘항상’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그리고 여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자격이 없다’는 더 가혹한 비판이 쏟아진다.
하위권 연습생들이 처한 상황도 가혹하다. 먼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힘들다. 프로그램에서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건 방송 분량이다. 방송 분량에 따라 순위가 들쭉날쭉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101명이나 되는 연습생들을 모두 비추기엔 방송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면 방송은 자연스럽게 극적인 상황을 이끌어낼 수 있는 연습생 또는 상위권 연습생을 위주로 편집이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방송에서 자신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초반에 떨어진 하위권 연습생들이 많다.
순위에 점점 위축되는 소년들과 경쟁에 심취되는 관중들
그리고 지난 9일 방송에서는 이 순위 강조의 잔혹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이날 방송에서는 3차 순위 발표식이 이어졌다. 시즌1에서 최종 결승전에 22명의 연습생이 무대에 올라갔던 것과 달리 이번엔 20명의 연습생을 최종 선발했다. 여기서 먼저 1등 후보인 강다니엘과 박지훈을 단상에 세웠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1차와 2차 순위 발표식에서도 1위 후보에 올랐던 박지훈, 김사무엘, 김종현, 라이관린을 단상에 세웠다.
그런데 이어진 장면은 잔혹했다. 1위가 강다니엘, 2위가 박지훈으로 밝혀진 가운데, 이번엔 20위 후보들을 단상에 세웠다. 20위는 무대에 설 수 있지만 21위는 그 기회를 박탈당한다. 그래서 강다니엘과 박지훈이 단상에 섰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단상 위에서 화면을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떠는 라이관린과 김용국의 모습은 순위 아래 짓눌린 소년들의 단상을 보여주며 안타까움을 줬다. ‘꼭 저랬어야 했나’ 싶을 정도로 순위 만능주의가 극하게 느껴진 잔인한 장면이었다.
결국 단상에 올라갔던 소년들 중 유일하게 김용국만이 탈락의 길을 걸으며 축하받지 못했다. 21위에 오른 김용국은 순위가 발표되자 “아쉽다”고 소감을 말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리고 무대에 오르는 20명의 친구들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자신의 자리로 씁쓸하게 돌아갔다. ‘너였다면’을 통해 감미로운 목소리를 선보인 김용국은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펼쳤고 멋있었다. 그런데 21위라는 순위 앞에서 김용국의 이름은 작아졌다. 어느새 방송은 소년들의 ‘꿈’ 이야기가 아닌 ‘순위’가 얼마인지에 더 집중하고 있다.
팀을 구성하는 최종 멤버를 뽑는 프로그램은 프듀만 있는 게 아니었다. 트와이스 멤버를 뽑는 ‘식스틴’도 있었고, 아이콘 멤버를 뽑는 ‘믹스 앤 매치’, 몬스타 엑스 멤버를 뽑는 ‘노 머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들이 거의 팀별 경쟁을 통해 후보생들의 실력을 봤다면, 프듀는 그 팀 사이에서도 순위를 유독 강조한다. 팀으로 호흡을 맞추면서도 하위권의 연습생이 상위권의 연습생에 “넌 안정권이잖아” 하면서 자신에게 파트를 더 줬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는 장면은 시즌1과 2 모두에 등장했다. “살려달라”고 하는 장면까지 있었다. 속한 팀이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팀 내에서도 순위 확보가 중요하기 때문. 그래서 화합보다는 경쟁이 강조된다.
이런 방송의 흐름은 시청자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시청자들 또한 데뷔조 11인 안에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또한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의 순위가 조금이라도 더 높기를 바란다. 순위를 확인한 뒤 “왜 저 연습생이 저 순위냐”는 논란이 매주 이어졌다. 프듀2에서는 팬들이 연합하는 현상도 있었다. 자신이 응원하는 연습생과 순위 경쟁 구도에 있는 연습생에게는 투표하지 않는 견제픽 현상도 불거졌다. 특히 견제픽은 상위권 연습생들 사이 심하다. 시즌1과 달리 시즌2의 1~3차 순위 발표식 1위 연습생이 모두 다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순위만 아니었으면 연습생 모두를 응원하고 싶다”는 팬들의 댓글도 흔히 발견된다.
경쟁 사회에서는 1위를 해야 인정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사회를 구성하는 건 1위만이 아니다. 뻔하고 고리타분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사회를 구성한다. 경쟁뿐 아니라 화합도 중요하다. 그런데 순위만을 강조하고, 또 순위만을 보게 되면서 진짜 그 사람을 점점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안타깝다. 프듀2는 이런 사회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방송을 보면서 처음엔 밉상인 연습생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정이 들어버렸다. 그들의 순위가 바로 꿈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순위가 아닌 이들의 ‘꿈’을 응원하고 싶다. 어른들이 꿈을 가진 아이들에게 경쟁뿐이 아닌, 화합의 장을 펼칠 수 있는 자리 또한 마련해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