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미국의 영화감독 겸 배우였던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 에나 나올법한 비인간적인 노동통제가 2005년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지회(지회장 김혜진 이하 하이텍노조) 노조원 모두가 회사 쪽의 부당한 노조 감시와 차별로 인해 정신질환이 생겼다며 지난 10일 집단 산재 신청을 해 주목을 끌고 있는 가운데 18일 오후 근로복지공단 관악지사 측이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현장조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현장조사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근로복지공단과 하이텍노조 등이 마찰을 빚는 등 사전 회의부터 순탄치 않은 현장조사가 진행됐다.
현장조사 전 회의를 통해 민주노총, 전국금속산업노조연맹,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등 41개 시민․사회 단체가 조직한 ‘하이텍알씨디코리아 조합원 감시와 차별로 인한 집단정신질환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는 근로복지공단 측에게 △관리자의 감시와 통제가 용이하도록 하는 조합원 생산라인의 배치상황 △ CCTV와 카드 등을 통한 감시와 통제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차별적 임금 인상 유무 △임산부 폭행 사건 등 회사 측의 폭언 및 폭행 등 8가지 조사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오기현 보상부장은 “과거의 피해상황은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현재 확인 가능한 것을 객관적이고 신속하게 조사하기 위해 나왔다”며 “사측이 노측의 현장조사 동행 인원을 1명으로 제한해달라고 했으므로 노측도 최소한으로 (동행인원을) 제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하이텍노조 김혜진 위원장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축적된 차별과 억압으로 인해 생긴 질환인데 현재 상황만을 확인하겠다는 것은 너무 협소한 조사가 되지 않느냐”며 “현장조사에 (산업)재해 당사자가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측이 동행인원을 제한하자고 했다고 해서 노조동행을 막는 근로복지공단이 사측과 다를 게 뭐가 있냐”며 공단측의 불합리한 요구에 목소리를 높였다.
하이텍노조와 근로복지공단의 실랑이 끝에 시작된 현장조사의 첫 번째 대상은 회사 모든 출입문에 부착돼 있는 출입통제 시스템이었다.
비조합원들은 거의 모든 공간에 출입이 가능한 반면 조합원의 카드는 조립작업이 이뤄지는 공간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설게돼 있어 총무부 출입문에 조합원 카드를 대자 “이 카드는 출입이 금지된 카드입니다”라는 소리가 나왔다.
회사 곳곳에는 CCTV가 설치돼 있었으며, 근로복지공단의 현장조사가 시작되자 회사 쪽 지원본부 관계자는 기자들의 현장조사 동행을 제지하면서 “기자들이 취재 온다는 소리는 들은 바 없다”며 “노동부에서 나와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니 현재로써는 확실히 답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기자들이 취재방해에 대해 항의했으나 회사측의 출입문 통제 등으로 기자들이 현장조사 곳곳에 동행취재를 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현장조사가 이어진 생산팀 작업실의 건물은 온통 ‘부당해고 박살’, ‘원직복직 쟁취’ 등의 글자가 락커로 선명하게 씌어져 있었다.
배수진 공대위 총무는 “회사는 이미 노동임금이 싼 필리핀 등으로 생산라인을 옮겨 놓은 상태”라며 “어차피 이 회사를 없애려고 하니까 락커 자국도 방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김 위원장도 “2500평에 달하는 회사 땅값은 98년에 52억원이었는데 현재는 평당 800만원으로 올라 200억원에 달하니, 회사를 외국으로 옮기면 회사로서는 큰 이익을 얻게 된다”며 “그렇다면 회사가 생산팀을 없애려고 할 때 노동조합이 제일 큰 걸림돌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해 조합원이 생각하는 회사의 조합원 억압 이유를 내비쳤다. 실제로 근처 H부동산에 문의한 결과 "실거래가가 최소 평당 800만원 이상"인 것으로 밝혀졌다.
회사의 조합원 차별에 대한 흔적은 락커자국 이외에도 곳곳에 설치된 CCTV 카메라와 비조합원들 사이에 끼어 비조합원과 관리자의 감시와 통제를 받고록 배치된 조합원들의 생산라인, 조합원들 자리에 커텐처럼 드리워진 ‘신문지 가리개’ 등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식당 옆에는 커다란 전지에 ‘울타리별 실적’이라는 그래프 표가 게시돼 있었다. 회사 해고자 ㄱ씨에 따르면 이러한 게시물은 ‘큰울타리, 한울타리, 씨 울타리, 사랑울타리’ 중 조합원의 그룹인 ‘씨울타리’가 실적이 낮은 부분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현장조사가 한창이었던 5시경 조립라인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ㅇ모씨가 양손과 팔에 마비가 오는 사건이 벌어졌고, 회사측 관리자는 이씨를 병원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 둔채 기자들에게 “총무팀에 허락받고 들어온 것이냐”고 따져 묻기에 급급해 주위 조합원들의 비난을 샀다.
● 비조합원의 조합원에 대한 감시와 통제, 그 깊어진 인간관계의 골
얼마전까지 생산업무를 하다가 ‘업무방해’ 등을 이유로 회사로부터 해고된 ㄱ씨는 비조합원과 조합원 사이의 반장을 중심으로 한 감시와 통제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가중된다고 증언했다.
“만약 조합원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옆에 있던 비조합원은 ‘몇월 몇일 누가 몇시 몇분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옴’이라고 작성해 위에 보고를 해요. 그러면 관리자는 그 자료를 토대로 ‘풀뽑기 잘한 직원’ 등 갖가지 이름을 붙여 선행상과 함께 3만원짜리 상품권을 주거나 하는 특혜가 있으니까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골은 더 깊어지는 거죠.”
김 위원장도 조합원으로 직장을 다니는 것은 ‘생지옥이나 다름없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김 위원장은 “직장폐쇄 기간동안 비조합원들에게는 작업장 안에 정수기를 대주면서, 조합원들에게는 휴게실에서 쉬거나 식당에서 밥을 먹을까봐 못들어가게 쇠사슬로 막아놓더라”면서 “비조합원과 관리자의 눈치를 보며 신문지 하나에 몸을 숨긴 채 말도 제대로 못하고 숨도 제대로 못쉬면서 자식들에게까지 신경질을 내게 돼 매일매일이 지옥”이라고 말하며 솟아 나오는 눈물을 참아보려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하이텍 노동자의 정신질환 문제는 지난 2003년 1월 임산부 폭행사건으로 부각된 바 있다.
임산부 폭행사건은 당시 노조간부 5명 해고 및 조합원 전원 징계 사태로 회사벽에 걸어두었던 플랭카드를 떼어간 회사측에게 플랭카드를 돌려달라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당시 회사측 간부 ㅂ모씨는 비조합원으로 구성된 구사대 50~60명을 내세워 실랑이를 했고 그 과정에서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신애자(38)씨를 폭행해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ㅂ씨는 폭행죄로 벌금 70만원만 내고는 사건 다음주에 오히려 승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고, 회사측은 조합원 5명을 상대로 맞고소를 한 상태다.
당시 임산부 폭행사건의 당사자인 신애자(38)씨는 옆에 있던 작은 체구의 한 해고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키도 작고 힘이 없는 30~40대 여성 노동자가 키도 크고 덩치도 큰 ㅂ씨와 구사대들의 멱살을 붙잡고 폭행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겠느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번 산재 신청을 담당한 유성규 공인노무사는 “이런 폭행문제가 발생했을 때 법을 집행하는 공안검찰이 사측의 사람이 들어오면 ‘어서오십쇼’하면서 노동자가 들어오면 ‘빨갱이 아니야’라는 식으로 노동자를 불온하게 보기 때문에 임산부 폭행사건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 같다”며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유 노무사는 또 “이런일이 발생했을 때 노동자는 사법적으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수밖에 없다”며 “억울한 노동자가 의지할 곳이라곤 근로복지공단밖에 없는데 오늘 공단측 태도를 보니 답답하다”고 노동인권의 현실의 열악함을 토로하며 한숨지었다.
18일 현장조사를 마친 조 보상부장은 이번 조사에 대해 “정신질환이라는 특수한 형태의 산재보상인 만큼 신청인과 회사측의 진술과 관련자료를 충분히 확보해 검토한 뒤, 최대한 빨리 결론을 내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그러나 아직까지는 조사 결과나 결과가 나올 시기에 대해 확답할 수 없다”고 근로복지공단의 입장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