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청 역사-문화재 위원(사진= 김진부 기자)
지난 9월 28일 시행된 일명 김영란법, '부정 청탁 및 금품수수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대상에 거의 모든 국민들이 포괄적으로 포함되면서 2016년 후반기에 '청렴'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의 시대에 주목받는 장소가 바로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 70-2에 위치한 고려말기의 명장 '최영 장군의 묘'다. 특히 올해가 최영 장군의 탄생 700주년이어서 고양시는 8일 최영 장군 묘에서 위령굿을 진행할 예정이다.
최근 판사, 검사 등 법조인들의 부정부패가 인구에 회자되면서 새로운 법조인들이나 공직자들이 많이 찾는다는 이곳, 최영 장군의 묘에는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것일까? 지금 이 시대에 그동안 조명되지 않던 고려시대 최영 장군을 부활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양시청 역사-문화재 위원인 정동일 씨를 만나 최영 장군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음은 정 위원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김영란 法의 시대에 고양시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가 화제가 되는 이유는?
김영란법이 화두인 이 시대에 고려 말기 최영 장군의 묘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의 '청렴성' 때문이다. 게다가 올해가 최영 장군 탄생 700주년이다. 심지어 고양시 대자동에 위치한 묘지에 오면 다른 선인들의 묘지와는 달리 시비 하나 없는 초라할 정도의 묘가 그의 전체 삶을 가로지르는 청렴성을 대변해 준다.
14세기 최영 장군은 왜구를 격파하거나 홍건적을 토벌한 후 전리품 등 재물을 가져와도 이를 모두 고려에 반납한 것으로 유명하다. 휘하의 장수들에게 토지나 노비 등을 나눠준 이성계와는 대별된다.
고려의 최영 장군은 요동지방인 남만주 요하의 동쪽 지방이 원래 우리의 땅이라는 큰 생각을 품고 1388년 명나라의 압력을 배제하기 위해 영토를 넓히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큰 장군이면서 청렴해 그의 청렴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끝까지 고려를 사수하고 이성계의 끈질긴 회유를 거절해 결국 반역죄로 처형을 당한 후에는 비가 세는 집 한 채가 재산의 전부일 정도로 청렴했다.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있던 큰 인물이 가장 청렴한 것, 그것이 바로 오늘날 최영 장군이 조명받고 있는 이유다.
-8일 최영 장군의 위령굿 행사가 오전 10시부터 진행된다고 들었는데
최영 장군 탄생 700주년을 맞아 오는 8일 최영 장군의 묘 앞에서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12거리로 6시간 넘게 진행될 예정이다. 약 10년 전 고양시 문화재로 지정된 이 위령굿은 고양시에서 태어나 60년을 넘게 굿을 하고 있는 유명한 무당이 진행하는데 대략 오후 1시 경에는 작두를 올라탈 예정이다.
일반 굿과 다르게 위령굿은 활과 칼쓰기에 능수능란했던 최영 장군의 모습 그대로 갑옷과 투구를 쓰고 활을 쏘고 칼춤을 추는 특별한 굿이다. 오래 전에 시나 도에서 예산이 지원되지 않을 때 이 무당이 직접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 규모가 작은 굿을 해오던 것을 저와 교수들이 보고 이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공통된 생각에 10여 년 전 문화재로 지정된 후 지금까지 위령제를 진행해 오고 있다.
무속인들의 70-80%가 최영 장군을 모시고 있다. 최영 장군은 장군 중 1등이라 해서 최일 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양시 무속인들은 90%가 그를 모신다. 최영 장군은 제주도, 추자도, 충청도, 경상도 등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황해도에서는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성 앞에서 막아내는 등 큰 활약을 해 전국의 무속인들이 가장 기가 센 신으로 모시고 있기도 하다. 무속인들 중 30년 이상된 분이 아니면 계단을 다 올라가 무덤가에 가지 못할 정도다.
▲고양시 대자동에 위치한 최영 장군 묘(사진= 정동일)
-2014년 산불이 났을 때 최영 장군 묘만 타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던데
2014년에 산불이 나서 인근의 나무를 다 태웠던 적이 있는데 당시 이를 무속인들이 사진을 찍어서 불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블로그에는 최영 장군의 기가 세서 즉 그의 영험함 때문에 그 무덤이 불에 옮겨 붙지 않았다라고 글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당시 산불을 진화하는 과정에서 최영 장군의 묘는 꼭 지켜야 한다는 최성 시장의 지시로 공무원들이 합세해 묘지 인근에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진화작업을 한 것이었다. 사실 이내용은 고양시 공무원들만 아는 얘기다.
따라서 지금도 묘지에 올라가면 산불로 죽은 나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최영 장군의 묘는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다. 장군의 후손들이 협조적이어서 그 이후 무덤은 건드리지 않고 축대나 올라가는 길 등을 보수했다.
-최영 장군 앞에 있는 남자 문인석 얼굴의 코가 없다고 들었는데, 이유는?
최영 장군묘는 부인과 합장된 묘로서 부친의 묘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묘의 왼쪽에는 최영 장군의 문인석, 오른쪽에는 부인의 문인석이 한 쌍으로 있는데 남자 문인석의 코가 없다. 이유는 워낙 영험하고 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영 장군 묘 앞에 있는 남자 문인석의 코를 베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말이 있어서 사람들이 조금씩 잘라가서 지금은 코가 아예 없다. 오른쪽 여성 문인석의 코가 오똑하게 있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저는 남자 문인석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말해 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아들이 아닌 딸을 낳겠다며 여자 문인석으로 몰려 간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웃음).
-고양시에 문화재가 경기도에서 가장 많다고 들었다
그렇다. 경기도에서는 고양시가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우리나라 전체에서는 5번째다. 특이한 점은 문화재 중 왕릉 등 선인들의 무덤이 많다는 점이다. 왕릉은 명당에 자리하는 것이 맞다. 고양은 과거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지점으로 지금의 강남에 해당할 정도로 왕래가 빈번하고 터가 좋은 곳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왕릉 등 유명한 분들의 묘지가 많은 이유다.
지금의 강남은 과거 한강으로 막혀 있어서 한양에서 강을 건너 운구할 수 없어서 왕릉의 묘지로 사용되지 않았다. 고양의 양(陽)은 한양의 양자와 같은 볕양(陽)자다 그 만큼 가장 좋은 땅이라는 의미다.
고양시는 고려 공양왕릉과 조선시대 왕릉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서울에서도 접근성이 좋아 시티투어를 하는 많은 분들이 고양시의 왕릉 등 문화재를 많이들 보고싶어 한다.
-고양시 역사문화재 위원으로서 아이들 역사 교육과 관련해 좋은 생각이 있나?
최근들어서 우리나라 교과서가 역사와 문화재 교육이 필수가 됐다. 그러나 아직 그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너무 이론 중심의 역사교육만 이루어지고 있다. 제가 보기엔 아이들이 야외로 나와서 문화재를 보고 눈 앞에 있는 현장을 봐야 한다. 연도나 외우고 사람 외우고 법 외우고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현장을 보고 논술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데 이러한 교육이 초등학교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고 재미있는 역사교육 그리고 후손들에게 이어가는 역사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보다 기성세대부터 먼저 현장 중심의 역사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성세대가 역사교육이 안돼 있고 인성교육이 안된 상황에서 아이들에게만 이론적인 역사교육을 시키려하니까 아이들이 흥미를 잃어 인터넷에 빠져있고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저는 아이들 데리고 역사 문화재 답사를 가면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아이드이 직접 문화재나 유적지에 가서 현장을 봐야 교육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게 하고 함께 온 엄마들에게도 똑같이 교육을 한다. 이는 살아있는 역사를 통해 가족간에 대화가 이루어지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저는 역사는 교육이므로 핵심은 현장에 있는 문화재 교육이므로 반드시 답사를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 가는게 좋다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가는게 좋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동일 약력
정동일 위원은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 출신으로 현재 고양시청 역사문화재 위원으로 수십년째 일하고 있다. 고양시 문화재 심의위원, 고양시 지명 위원, 고양시 학교명 선정 위원으로 미국대사관, 군부대, 학교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과거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 위원, 대한민국 감사원 감사교육원 강사, 고양시 문화유산 답사회 지도교수, 연세대학교 사회교육원 강사, 항공대 사회교육원 강사 등을 역임했다.
CNB뉴스(고양)= 김진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