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병원과 도매상, 진화하는 ‘밀월’
아들·손자까지 동원된 ‘신종 리베이트’
가족 간 일감몰아주기, 이윤 극대화
제약업계의 고질적 문제인 리베이트는 처벌이 강화될수록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전북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지난달 23일 최근 5년간 직영 2곳을 포함해 의약품 도매업체 6곳으로부터 18억여원의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전주병원 이사장 박모(60)씨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박 이사장은 뒷돈을 받아 개인 부채를 갚거나 각종 보험료, 카드 값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이사장이 리베이트를 받는 과정은 ‘친족도매 거래제한법’을 교묘히 피하는 새로운 수법이었다.
지난 2012년부터 시행된 친족도매 거래제한법에 따르면, 병원 소유자(이사장 등)와 소유자의 2촌 이내 친족은 의약품도매업체의 지분 50% 이상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삼촌이나 사촌, 지인 등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박 이사장은 일명 바지사장을 두고 직영 도매상 2곳을 운영하며 뒷돈을 받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제약회사 29개사는 리베이트를 제공하기 위해 전주병원과 사전에 만나 약값을 담합한 혐의를 받고 있으며, 유명 제약사 다수가 연루돼 있는 것으로 파악돼 파장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경찰은 박 이사장뿐만 아니라 도매업체 대표 홍모(47)씨를 같은 혐의로 구속하고, 도매상 및 병원 관계자 28명을 불구속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또 제약사 29곳의 영업 담당자와 법인관계자 등을 소환해 모두 조사를 마친 상태다.
또 전국에 5개의 종합병원을 보유하고 있는 인제학원 백병원의 오너 일가는 중간 간납(구매대행)업체를 통해 리베이트를 수수했다.
부산지검 특수부에 따르면 백낙환(89) 인제대학교 명예총장 겸 백병원 전 이사장은 수십 년간 알고 지낸 지인 박모(60)씨를 간납업체 (주)인석의 바지사장으로 내세웠다.
백 전 이사장 일가가 8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인석은 전국 백병원 5곳의 의약품과 의료기기, 사무용품 등 병원에서 쓰이는 모든 용품의 구매를 중간 대행했으며, 커피숍, 식당, 장례식장 등 병원 내 부대시설 운영까지 독점했다.
그 결과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백병원은 매년 적자를 기록했지만, 인석은 연간 1200억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으며 이 중 112억원이 백 전 이사장 일가와 박씨 등에게 배당금으로 지급됐다. 여기에다 백 전 이사장과 박씨는 의료기기 업체 등으로부터 13억여원의 뒷돈까지 받았으며, 대부분은 백 전 이사장이 개인 용도에 쓴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사례들은 기존에 대형제약사들이 병원관계자들을 로비하는 전통적인 리베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최근 몇 년간 리베이트 혐의로 적발된 대웅제약, 동화약품, 일양약품, 일동제약, 중외제약, 녹십자, 광동제약, 한미약품, 대원제약, 삼일제약, 영풍제약 등 대형제약사들은 대부분 병원 측을 상대로 직접 로비를 벌인 경우들이었다.
인제학원 관계자는 CNB에 “백낙환 전 이사장 비리 건에 대해서는 이번 수사가 진행되면서 인지했으며, 일가가 설립한 특수관계사를 통해 불법을 저지른 것으로 알고 있다. 인제학원은 교육부 감사지적 이후 특수관계업체와의 거래를 이미 정리했으며, 이사회에서 향후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백 전 이사장은 2014년 2월 인제학원 이사장에서 퇴임했으며, 본원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약사법 ‘구멍’…먹이사슬 ‘진화’
앞뒤 상황을 종합해보면 제약업계 리베이트의 핵심이 ‘의약품 도매상’이다.
의사의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은 의료보험이 적용돼, 약값의 일정부분을 정부(건강보험공단)에서 부담한다.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부담하는 항목이다 보니, 보건복지부가 매년 약값을 정한다. 제약사는 이 약값 이상으로 병원에 공급해선 안 된다.
따라서 제약사와 병원은 보건복지부가 정한 최대상한액으로 약값을 정해 거래한다.
이렇게 되면 병원은 정부가 정한 한도액까지 지원받을 수 있고, 제약사 또한 이윤을 최대한도까지 남기게 된다. 이에 대한 대가로 제약사는 병원에 다양한 형태의 리베이트를 제공한다.
여기에 끼어 있는 것이 의약품 도매상이다. 가령 제약사가 기준 약값 100원인 의약품을 도매상에 50원에 공급한다면, 병원은 도매상으로부터 100원에 구매한다. 병원은 건강보험공단에 100원에 신고, 공단은 병원에 100원을 기준으로 건강보험수가(정부지원금)를 지급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50원짜리 약이 100원으로 부풀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생긴 50원의 이윤은 제약사와 도매상, 병원에게 골고루 돌아간다. 병원 오너가 직접 ‘의약품 도매상’을 소유할 경우 이윤은 더 커지게 된다.
이와 관련해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지난 22일 CNB에 “‘제약사-도매상-병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전형적인 제약업계의 리베이트 행태다. 공정한 경쟁을 해치는 행위이며, 결국 이들이 만들어내는 뒷돈은 의료보험비를 납부하고 있는 국민들이 부담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CNB=김유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