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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텔링] 5.18 36주년…전두환은 어떻게 ‘1조원’을 모았나

또 불붙은 추징금 납부 논란, 입 다문 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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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유림기자 |  2016.05.18 09:33:55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가 은닉한 불법 비자금 규모를 3000억~1조 원 대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뇌물죄 성립으로 밝혀낸 추징금은 2205억원이며, 20년이 흘렀지만 환수된 금액은 절반 가량인 1134억원에 불과하다. 사진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서울 연희동 자택 골목길의 17일 오후 모습. (사진=김유림 기자)

5.18 민주화운동 36주년을 맞아 새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과거 재산이 주목된다. 전씨는 과거 비자금 혐의로 기소되자 “29만원이 전 재산”이라고 말해 국민들의 분노를 산 바 있다.  전씨 비자금에 대한 대검 중수부의 수사발표 기록에 따르면 대통령 재임 시절 은닉한 돈이 1조원(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4조원)에 이른다. 그는 당시 어디서 그 많은 돈을 모았을까? CNB가 내막을 따라가 봤다. (CNB=김유림 기자)

상납 거부하다 하루아침에 공중분해
故정주영 “괴로움 당하지 않기 위해”
법 심판 끝난 전씨, 여전히 호화생활

전씨가 은닉한 비자금의 출처는 대통령 재임 시절인 1980~1987년 동안 재벌 총수들로부터 받은 돈이라는 게 정설이다.

1988년 열린 5공비리 청문회, 1995년 재판기록 등에 따르면 전씨는 주로 당시 경호실장의 주선을 통해 재벌 총수와 단독으로 만난 자리에서 금품을 요구했고, 재임기간 동안 총 7000억원 가량을 상납 받았다.

여기에 ‘기부금’ 명목으로 별도로 거둬들인 일해재단 기금 598억5000만원, 새마을성금 1495억원, 새세대육성회 찬조금 223억원, 심장재단 기금 199억원 등까지 합하면 총 1조원을 갈취한 셈이다.

특히 전씨가 총수들에게 받은 돈의 일부는 최측근인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1995년에 쓴 책 <일해재단>에 구체적으로 기록돼있다. ‘일해재단’은 1983년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 유족을 위한 장학재단으로 설립했지만, 사실상 기업들에게 상납을 받기 위한 도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각종 장학재단을 만들어 기업들로부터 기부를 강요했다. 이런 내용은 '전 씨의 그림자'로 알려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1995년에 펴낸 책 '일해재단'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김유림 기자)

<일해재단> 책에 따르면 1984년부터 1987년까지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총수는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51억5000억원)다. 2위는 각 45억원을 출연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고 박태준 포스코 회장, 3위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40억원이다.

뒤이어 구자경 LG그룹 회장 30억원,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28억원, 이준용 대림그룹 회장 23억원, 고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22억원,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20억원, 고 유찬우 풍산그룹 회장 18억원,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 15억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15억원, 고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14억5000만원,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13억원 등의 순이다. 그밖에 동아제약, 코오롱그룹, 종근당, 아모레퍼시픽, 효성그룹, 금호그룹 등이 5~9억 원씩 기부금을 내놨다.

1980년대 초 서울 아파트 한 채가 평균 1200만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상납한 금액은 기업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돈의 성격에 대해서는 지금도 주장이 엇갈린다. 전씨 측은 여전히 ‘통치자금’이라고, 재벌들은 ‘살기위해 바친 보험금’이었다고 말한다. 

1988년 일해재단 비리 조사를 위해 열린 청문회 당시 정주영 회장은 정치자금 상납 이유에 대해 “힘 있는 사람으로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1988년 일해재단 청문회에서 노무현 당시 민주당 의원이 장세동 전 안기부장에게 전두환 정권의 정경유착을 추궁하는 장면. (사진= 당시 방송화면캡처)

상납 거부하면 ‘공중분해’

실제로 상납을 거부한 기업은 본보기로 한순간에 ‘공중분해’ 되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왕자표 고무신’, ‘프로스펙스’로 잘 알려진 ‘국제그룹’은 권력에 밉보였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국제그룹은 당시 21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재계 순위 6위였다. 특히 부산 제 1의 향토기업으로, 1982년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 설치된 전시관이 같은 향토기업인 롯데그룹을 압도할 정도로 위상이 대단했다.

하지만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다른 재계 총수들과 달리 정치 자금을 건네는 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1985년 부실기업이라는 오명을 쓰고 21개 계열사가 강제 해체됐다.

이후 양 회장은 그룹 복원을 위해 소송을 내는 등 고군분투한 결과, 1993년 7월 “정부에 의한 국제그룹 강제 해체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이미 대부분 계열사들이 다른 기업으로 흡수합병된 후였기 때문에 기업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전두환 정권에게 상납을 거부한 재계 순위 6위 ‘국제그룹’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됐다. 사진은 1985년 2월21일 국제그룹의 공식 해체를 발표하는 이필선 당시 제일은행장. (사진=당시 방송화면캡처)

또 재계 9위까지 오르며 13개 계열사를 거닐던 국내 최대 면방직기업 ‘삼호그룹’ 역시 해체와 관련된 여러 비화가 있다.

1980년대 ‘돈병철, 땅봉구’(돈은 삼성 이병철 회장, 땅은 삼호 조봉구 회장)라는 말이 유명했을 만큼 조봉구 삼호그룹 회장은 내로라하는 재벌이었다.

삼호그룹 해체의 표면적인 이유는 “무리한 기업 확장과 해외 공사 부실”이었으나, 사실 “전두환 정권에 미운털이 박혀 해체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삼호그룹 일가로 알려진 가수 조덕배는 해체 당시 상황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바 있다. 조씨는 “그룹 해체 발표가 나오기 직전 이순자 여사가 서울 방배동에 위치한 작은 아버지(조봉구 회장) 저택을 찾아왔고, 정원에 500년 된 미루나무를 본인 정원으로 가져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숙모님이 그 자리에서 무안을 줬는데, 공교롭게도 그 다음날 합동수사본부에 사촌형이 끌려갔고, 또 그 다음날 각 신문에 삼호그룹 해체기사가 나왔다”고 말했다.

전 재산 29만원의 ‘호화생활’

검찰은 현재 전씨 부부, 자녀, 친·인척 등 전씨 일가가 은닉한 재산이 최소 3000억원에서 1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씨 비자금 중 뇌물죄 성립을 밝혀내 추징금으로 선고된 금액은 2205억원에 불과하며, 환수된 금액은 절반 가량인 1134억원이다.

전씨는 여전히 추징금을 못 낸다며 버티고 있다. 그러면서 손녀의 호화 결혼식, 수시로 터지는 해외 골프 라운딩 등 호화생활을 즐기고 있다.

전씨의 화려한 삶이 드러날 때마다 ‘추징금 환수’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 <한국재벌사>의 저자 이한구 교수(수원대 경제금융학과)는 CNB에 “‘최고권력자(전두환)를 한번 알현(謁見) 하려면 최하 10억원이 든다’는 말이 돌던 시절이었다. 돈줄(은행)을 정부가 쥐고 있다 보니 요구하는 대로 갖다 바칠 수밖에 없었고, 고분고분한 기업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온갖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다. 한국재벌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라고 말했다.

(CNB=김유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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