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석기자 | 2015.10.17 10:26:48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38도선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일제히 포격이 시작됐다. 1129일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남침암호 '폭풍'이 북한군 전군에 하달되면서 38도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 제1·2·3·4·5·6·12사단과 제105전차여단 등 11개 지점에서 일제히 국경을 넘어 침공했다.
오전 9시 주문진과 개성, 그리고 청단에 북한군이 진입했다. 국군은 옹진반도에서 후퇴했고, 북한군 선두는 이미 임진강을 도하했다. 춘천 모진교 일대에 포격이 집중됐다. 구룡포와 울진, 강릉, 삼척, 묵호 16㎞ 북방지역에서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그대로 파죽시세.
북한의 작전계획은 25일 이른 새벽에 작전을 개시해 1단계로 옹진반도에서 국지전을 벌인 뒤 주 공격선은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2단계 작전은 서울과 한강을 장악하는 것으로, 동부전선에서 인민군(북한군)은 춘천과 강릉을 해방시키고 서울 일원에서 남조선군(국군) 주력을 포위해 궤멸하는 작전을 병행키로 했다. 마지막 3단계 작전은 여타 지역을 해방시켜 남조선군(국군) 잔여 세력을 소탕하고 주요 인구밀집 지역과 항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북한의 작전계획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춘천대첩으로 불리는 춘천지구전투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부터 춘천 시내가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진 6월 27일 오후 6시까지 어디에서 어떤 상황들이 벌어진 것일까.
6월 25일 새벽 4시 비극의 시작
전방의 이상징후는 전날 밤부터 감지되기 시작했고, 25일 새벽 1시 웅진의 제17연대에서, 새벽 3시경 문산의 제1사단과 의정부의 제7사단으로 북한군의 도발징후가 보고됐다.
전방에 위치한 춘천에도 공격이 시작됐다. 춘천~홍천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전투는 심일 소위의 자주포 육탄공격의 춘천지구전투와 육탄 11용사의 말고개 전투로 회자된다.
북한군 포병은 화천 말고개와 춘천 원평교 인근에 위치한 모진교 일대에 집중 화력을 퍼붓는다. 당시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모진교를 방어하고 있었다. 모진교는 원평저수지 부근에 위치한 곳으로, 현재 춘천댐 건설로 수장된 상태다. 당시 모진교는 화천에서 춘천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유일한 교량으로 전술상 요충지였다.
모진교를 확보하기 위한 피아간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북한군은 SU-76 자주포의 지원 등 막강한 화력을 앞세워 새벽 6시경 모진교를 확보한다. 이후 국군 제7연대의 방어정면이 급속히 와해되며 북한군은 춘천 북방 외곽까지 빠르게 진격한다. 이 당시 국군은 자주포를 탱크(전차)로 오인하고 있었다.
북한군은 자주포 10대를 앞세우고 옥산포로 진출한다. 심일 소위의 자주포 육탄공격은 이 때 시도된다. 제7연대 57㎜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 일 소위는 자주포가 대전차포 공격에도 끄떡도 없자 기습적인 육탄 공격을 감행키로 한다.
특공조 5명과 함께 화염병과 수류탄을 옥산포 길목에 매복한 심 일 소위는 아군의 대전차포 공격을 받은 자주포의 무한궤도가 끊기자 자주포 위로 뛰어올라 수류탄과 화염병을 자주포 속으로 집어던진다. 2~3초 뒤 수류탄의 파열음과 함께 자주포가 화염에 휩싸인다. 이 소식은 자주포에 대한 공포심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심 일 소위는 서울대 사범대학을 중퇴한 후 육사 8기로 임관해 춘천지구 전투와 동락리 전투, 무극리 전투 등에 참전했으며, 1951년 1월 26일 영월 북방 마차리 일대에서 수색작전 중 적의 총격으로 전사했다.
26일 소양강을 붉게 물들인 피아공방
옥산포 일대는 26일 새벽부터 피아간 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개활지인 옥산포에서 북한군은 제7연대의 집중사격과 제16포병대대의 포격으로 전멸직전 상태에 빠졌다. 옥산포 일대는 시체가 쌓여 갔고, 소양강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공격은 계속됐다.
북한군 제2군단은 공격 당일인 25일 춘천을 점령하는 게 목표였다. 주공인 제2사단을 춘천~가평 축선에 투입해 국군 6사단을 격멸하고, 조공인 제12사단을 인제~홍천 축선에 투입하는 한편 제603모터사이클 연대를 고속기동부대로 운용해 개전 이후 5일 내 수원 이남을 점령하고 포위해 국군의 퇴로와 증원 병력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제6사단의 저항 속에 개전 이틀째를 맞게 된 북한군은 ‘공격 당일 춘천 점령’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격한다. 이에 임부택 제7연대장은 26일 오후 연대지휘소를 우두산에서 봉의산으로 옮긴다.
27일 오후 6시 춘천 점령
27일 새벽 5시경 북한군은 춘천점령을 위해 집중포격에 나선다. 제7연대는 봉의산과 소양강 등 자연장애물을 최대한 이용해 방어에 나선다. 학도호국단과 제사공장 여공 등 시민들은 탄약과 식량을 공급해 주었고, 무너지는 진지를 자갈과 모래로 보강한다. 국군과 시민의 혼연일체로 전선을 사수하는 동안 소양강 중턱은 국군과 북한군의 시체로 뒤덮이는 참혹한 현장으로 변해갔다.
북한군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소양교를 정면 공격했고, 오전 11시경 소양교를 접수한다. 국군의 방어선이 붕괴되면서 북한군은 자주포와 증원 병력을 이용해 춘천 시내로 진입한다.
제6사단 사령부와 제7연대는 석사동에 집결하고 시가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당시 의정부와 문산 등 서부전선이 붕괴되고 육군본부 역시 서울에서 철수해 수원으로 이동 중이었다. 또 홍천 전방에서 제2연대가 위기에 빠져있었다. 결국 시가전을 포기하고 사단의 후방철수에 중요한 지점인 홍천 방어를 위해 춘천을 철수, 춘천~홍천 사이의 험한 고지대인 원창고개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북한군은 오후 6시경 춘천을 점령한다. 개전 당일 춘천 점령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3일을 지체한 것이다.
국군 한강방어선 구축에 기여한 구국의 전투
중동부 지역 작전인 춘천지구 전투의 전승의 의미는 축선별 전투상황을 살펴볼 때 더 크게 다가온다. 북한군이 25일 화천을 출발해 27일 춘천을 점령할 당시 옹진반도와 개성~문산 지역인 서부지역 작전의 경우 개전 당일 방어선이 무너졌고, 28일 서울이 피탈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문산은 서울의 관문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으나 개전 당일 이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결국 29일 시흥 철수 시 차량과 중화기 등을 한강 이북에 버려둔 채 퇴각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서울 북쪽인 동두천~포천 축선을 담당한 중서부지역 작전 역시 25일 저녁 10시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갔고, 27일 서울 사수를 위해 미아리에 최후의 방어선을 편성했으나 28일 적 전차가 방어선을 뚫고 서울시내로 진입하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채 서울을 내주고 말았다.
동해안 지역을 담당한 동부지역 작전의 경우 당시 해안선 방어는 마을단위 청년방위대와 경찰에만 의존하고 있어 해상을 이용한 북한군의 상륙작전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양양과 주문진을 거쳐 강릉으로 진격했고, 제945육전대는 정동진으로, 제766유격대는 동해 임원진에 상륙했다. 강릉 남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포탄을 운반하고 장병들에게 음료수와 빵을 나눠주는 등 힘을 보탰으나 28일 새벽 4시 강릉 공격에 나선 북한군은 오전 8시 강릉을 손에 넣었다.
이처럼 춘천지구전투는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춘천 옥산포와 소양강, 봉의산 일대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사흘간 지연시킨 전투로, 국군의 한강방어선 구축과 UN군 참전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구국의 전투다.
국방부는 지난 2010년 6.25전쟁 60주년을 기념해 ‘쌍용 페스티벌 행사’를 실시했으며, 이듬해인 2011년 춘천대첩의 의의를 부각하는 차원에서 춘천지구 전투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17일과 18일 춘천역 앞에서 펼쳐지는 2015년 춘천지구 전투전승행사는 국방부가 주관하고 2군단이 주최하며 강원도와 춘천시, 춘천보훈지청이 후원하는 민·관·군 통합행사로, 국방부 3대 전승행사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