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욱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처장 (사진=이성호 기자)
“약관상 실수가 아니라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판매를 해왔기에 지급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보험사기나 다름없다”(이기욱 금융소비자연맹 사무처장)
생명보험사들이 자살보험금(재해사망보험금)을 주겠다고 했다가 막상 지급을 요구하자 하나 같이 거부하고 있어 세간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다.
지난 2010년 4월 이전까지 대부분 생보사들은 특별약관에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 이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는 일반사망보험금의 2~3배에 달하는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이 보험사에 불리하다는 것을 인지, 2010년 4월 이후 판매하는 상품부터는 재해사망금을 주지 않고 일반사망금만 지급토록 약관을 고쳤다.
즉 보험사들은 2010년 4월 이전에 판매한 보험에 대해서는 특약에 따라 자살보험금을 제공해야한다.
하지만 보험사들은 이마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의 ‘미지급 재해사망보험금 및 재해사망특약 보유 건수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으로 생보사들이 고객에게 지급하지 않은 자살보험금은 무려 2179억원에 달한다. 재해사망 특약이 포함된 보험계약은 총 281만7173건으로 추산되고 있다.
2014년 ING생명이 560억원(428건)의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을 확인돼 금감원으로부터 지급방안을 마련할 것과 기관주의 및 49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 받았다. 하지만 ING생명은 금감원을 상대로 현재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또 금감원은 분쟁조정국에 접수된 자살보험금 관련 민원 39건에 대해, 해당 12개 생보사에게 재해사망 특약에 따라 지급할 것을 통보했다. 현대라이프·에이스생명은 금액이 크지 않아 받아들였지만 나머지 10개사(ING·삼성·교보·한화·동양·동부·알리안츠·농협·메트라이프·신한생명)는 오히려 민원인 37명에 대해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채무부존재소송’을 걸었다.
이처럼 생보사들이 지급을 거부하고 있는 명분은 크게 2가지로 압축된다. 형법상 해석 및 사회통념상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는 점과 약관상의 실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자살보험금 피해자들을 모아 공동소송에 임하고 있는 금융소비자연맹(이하 금소연) 측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하고 있다.
이기욱 금소연 사무처장은 CNB와 인터뷰를 통해 “보험사 스스로가 지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재해사망금을 준다며 7년간 보험을 팔아왔다”며 “약관상 실수가 아니라 이미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판매를 해왔기에 지급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한 보험사기나 다름없다”고 일갈했다.
금감원이 지난 2005년과 2008년에 조정한 분쟁사례를 보면 ‘계약의 책임개시일로부터 2년이 경과한 후에 자살하는 경우에는 피보험자가 고의로 자신을 해쳤더라고 보험자가 당해 보험약관에서 담보하는 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고 판단했다는 것.
특히 자살보험금 관련 민원 39건에 대해 지급하라며 해당 보험사에게 보낸 공문에서도 이 같은 조정사례를 적시함은 물론 분쟁조정 전문위원 3명이 법률 자문한 결과도 넣었다. 원래 자살은 재해사고에 해당되지 않지만 약관에 의해 범위가 확장되는 효력을 가지며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에도 합당해 지급함이 옳다고 했다는 부연이다.
약관규제법을 보면 약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해석돼야 하고 고객에 따라 다르게 해석돼서는 안 되며,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않는 경우에는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돼야 한다고 돼 있다.
이 처장은 “이미 금감원은 분쟁조정사례 등을 통해 자살보험금 문제가 불거질 것을 파악했지만 방치했고, 보험사들도 알고 있었지만 조치를 안 했다는 것인데 이제 와서 ‘실수’라고 운운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고개를 저었다.
보험사가 재해사망금을 준다고 특약을 작성했으면, 응당 그 약관에 따라 계약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금융당국·한국소비자원·국회 등에서도 지급을 하라고 했지만 보험사들이 오히려 소송을 걸고 시간을 끌며 피해자들이 제풀에 지치도록 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고객과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즉각 중단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은 이기욱 금소연 사무처장과의 일문일답.
▲이기욱 금소연 사무처장 (사진=이성호 기자)
-보험사들을 상대로 공동소송을 제기했는데.
금감원이 생보사들에게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한 39건 중 2건을 제외(현대라이프, 에이스생명)하고, 10개 생보사가 못주겠다며 ‘채무부존재소송’을 37명 고객들에게 걸었다. 이들 보험사들의 소송 대리인은 짠 것이나 한 듯 모두 A대형로펌 한 곳에 맡겼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보험금을 안주니 달라고 금감원에 민원을 넣었는데 뜬금없이 소장만 날라 온 것이다.
각 보험사에는 자체적으로 법률팀도 있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다 같이 명성이 자자한 A로펌에 의뢰한 것으로 소장을 받은 민원인들의 심리적 압박은 매우 큰 상황이다. 통상적인 문구지만 소장에는 ‘소송비용은 피고가 부담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를 받아보고 지레 겁을 먹고 벌써 피해자 한 분은 포기했다.
금감원은 지급하라고만 통보했을 뿐 어려운 사정에 처해 있는 이들에게 더 이상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이에 지난해 11월 ‘생명보험금청구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 피해자들을 모아 함께 대응키로 결의한 것이다.
우선 ING생명 등으로부터 채무부존재 소송을 제기당한 피해자들을 돕고 있고, 지난해 말까지 모집한 소송인단에 45명이 참여의사를 밝혀 삼성·교보·한화·메트라이프생명 등을 상대로 공동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오는 4월말까지 2차로 소송에 참여할 사람들을 접수받고 있다. 모집이 완료되면 해당 보험사를 상대로 추가 소송에 돌입할 것이다.
-소송에 참여하는 인원이 적은 것은 아닌가.
당초 공대위에 1차로 80여명이 소송에 참여하겠다고 접수했지만 중간에 포기하는 분들이 많았다. 사실 95% 정도는 함께 할 것이라고 봤지만 쉽지 않았다. 소송에 적극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우선 생활이 어렵고 숨겨놨던 상처를 다시 꺼내야 한다는 점이다.
배우자, 형제, 부모 등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생활환경이 상당이 좋지 않을 확률이 높다. 직접 접촉해본 바 대부분 풍족하지 못하고 열악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상담하러 온 B씨의 경우 남편이 자살했다. 자녀들은 아직 어린데 말을 안 해 줘 아빠가 죽은 것도 모르고 있다.
B씨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벌고 있지만 낮에는 전화조차 받을 수 없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 먹고 살기 빠듯한 가운데 큰돈과 시간이 들어가는 개별소송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비용이 저렴한 공동소송도 엄두도 못 낸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고 남은 가족들 대부분은 이처럼 삶의 질이 좋지 않다. 더군다나 상처를 또 다시 들춰내야 하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망설이는 부문이 크다.
아버지가 죽었다면 법적상속 문제이기 때문에 형제들 모두 위임장을 써 소송을 걸어야 한다. 한명이라도 싫다고 하면 진행할 수가 없다. 사실 소송하기에 가장 안 좋은 조건들이 이번 자살보험금 미지급건에 녹아들어 있기 때문에 보험사들도 소송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더불어 삶에 치여서 재해사망보험금이 지급되는 것을 모르는 분들도 상당히 많다. 이에 금소연에서는 보험사측에서 각 해당자들에게 통보를 하고 보험금을 줄 것을 요구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소연이 지난해 11월 생명보험금청구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했을 때 모습. (사진제공=금소연)
-보험금 청구권 시효가 짧은데.
보험금 청구 소멸시효는 2년이다. 최근 3년으로 늘어났지만 이 건들은 해당이 안 된다. 예를 들어 2014년에 자살했다면 소멸시효 2년을 적용받아 청구할 수 있지만 2년 전에 사망했다면 요구를 할 수 없게 된다. 사망시점을 따지는 것으로 기간이 지나면 보상을 받기 어렵다.
하지만 생보사가 지난 7년간 약 280만건에 달하는 상품의 약관을 고치지 않고 이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판매한 것은 결코 실수라 볼 수 없다. 알고도 숨긴 기망·불법행위로 민법상 소멸시효 10년을 적용해 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에 2차 공동소송에 참여할 피해자도 2005년 6월 이후 사망한 건들을 접수받고 있다.
-소송이 장기전으로 흐를 가능성은.
보험사들이 지리한 법리공방을 펼치고 3심까지 끌고 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소멸시효를 악용하는 것이다. 소송에서 이길 경우 참여한 사람만 돈을 지급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까지 3년 이상 걸린다고 하면 소송을 안 건 사람들은 지켜보다가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비용 부담으로 소송 도중에 포기하거나 줄소송이 차단되는 효과를 보험사들이 노릴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송은 보험사에게는 최대한 이득이 되는 플레이라는 것이다. 지더라도 그 부문에 대해서만 물어주면 되고, 잠재적 소송인들의 청구권이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지급해야 할 돈은 고스란히 보험사 창고에 쌓이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막아야 한다. 때문에 금소연에서는 민사상 소멸시효 10년을 주장하며 꾸준히 연이은 소송에 나설 방침이다.
-보험사들은 단순 실수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최근 법원에서는 C씨 등 2명이 삼성생명을 상대로 낸 보험금 지급 소송 1심에서 ‘약관에서 정신질환 자살과 보험 가입 후 2년이 지난 뒤의 자살을 병렬적으로 기재하고 있다”며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에서 약관대로 줄 것을 인정한 것이다. 약관은 보험사와 고객이 지켜야할 사안을 적어놓은 계약이다. 계약서 내용상 주도록 돼 있는데 표기상 실수라며 미지급하는 것은 달을 보라고 하는데 손가락을 보는 것과 같다.
7년간 알고도 판매한 행위를 볼 때 실수가 아닌 것은 명백하다. 금감원은 지난 2005년과 2008년 조정판례에서 2년이 경과한 후에 자살하는 경우에는 보험약관에서 담보하는 보험금을 지급하겠다는 취지로 약관이 해석된다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금감원이나 보험사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약관심사는 금감원의 책임이다. 2번이나 확인을 했으면 즉각 조치를 했어야 했고, 보험사들도 속히 해당 조항을 삭제했어야 했다. 이 당시 판매를 중지하고 약관 수정을 완료함과 동시에 과거 계약건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만한 대응을 했더라면 단순히 표기상의 오기라고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금감원도 발을 뺐고 생보사들도 방치한 것인데 지금에 와서 전혀 몰랐던 실수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보험사가 금융감독기관의 묵인(?)하에 알고도 팔았다는 것은 중대한 과실이다. 생보사들이 자살은 재해가 아니라고 하며 재해사망금을 지급할 경우 자살을 방조한다고 하는데 이는 보험금 미지급과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시 보험금을 줄 수 없다고 하면 약관에 명기하면 됐다. 그런데 계약자가 아닌 보험사 스스로 작성한 약관에 주겠다고 해놓고 지급을 거절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 생보사들은 자살보험금에 대한 보험료율을 책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원가에 반영을 안 시켰기 때문에 줄 수 없다는 논리인데 이 또한 마찬가지다. 계약서에 준다고 돼 있기 때문에 달라고 하는 것이다.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에 따라 계약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돼야 하지만 보험사들은 애써 이를 부정하고 있다. 자살은 재해가 아니다. 하지만 재해사망금을 준다고 했으니 줘야하는 것이다.
▲금소연은 자살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생보사를 대상으로 보험상품 불매운동도 진행하고 있다.(사진제공=금소연)
-향후 계획은.
보험사는 계약자와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지금 보이고 있는 행태는 스스로 신뢰를 걷어차 버리고 있다. 응당히 줄 것을 꼼수를 부리며 안주는 것으로 대형 보험사기라 할 수 있다. 사회적 문제가 됐어도 고객을 상대로 사과한 적도 없다. 믿음을 져버리고 주주 이익만을 위해 소송에만 혈안이 돼 있어 전무후무한 일로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금감원도 이 부문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 보험사로 하여금 미지급 보험금을 주라고 할 뿐 책임을 지지 않았다. 법원의 판단을 지켜보자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금감원에서는 최소한 민원인들에게 개별적으로 안내장을 보내 소송이 진행될 경우의 절차나 변호사 소개 든 어떻게 하라는 등 알려줬어야 한다.
금융 건전성과 소비자 보호를 해야 함에도 법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태도는 책임회피다. 자살보험금 지급 공동소송은 이기려고 하는 것으로 꾸준히 소송인단을 모아 보험사를 상대로 싸워 나갈 것이다.
(CNB=이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