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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잃은 슬픔에 바다를 밟고 들어가 순국하다

기획시리즈 - 우리 고장 순국선열의 혼을 찾는다> 5.영양 김도현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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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홍석천기자 |  2014.12.29 09:16:07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은 지 거의 70년이 됐지만 아직까지도 일본은 독도가 자국영토라는 망언이나 역새왜곡 등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조국의 독립과 국토수호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고 있다. 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본받아 시대를 살아가는 시금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북이지만 많은 지역민들은 이들이 조국을 위해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펼쳤는 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던진 경북의 순국선열들을 지역별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편집자 주>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은 1852년 영양군 청초면 소청리(지금의 청기면 상청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으로 세조 때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충의공 김문기(金文起)의 15세손이다.

어린 시절 조부인 김하술의 괴암서당에서 글을 배웠다고 전한다. 조부는 성품이 인자하고 학문도 뛰어났다. 부친 또한 성품이 온후해 항상 도(道)로써 자녀를 가르쳤다고 전한다. 13살 때 조부가 세상을 떠나자 안동․예안 등지의 퇴계학통 인사들과 교유했다. 

한때 과거에 뜻을 두기도 했으나 관료들의 부패와 전횡을 직시하고 귀향한다. 과거를 포기했다고 김도현이 현실문제 자체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35세가 되던 1886년, 괴질이 돌아 동민 모두가 산야로 피신을 할 때, 그는 홀로 환자를 돌보며, 숨을 거둔 사람을 손수 거두기도 했다. 

1895년 11월 단발령이 있자, 김도현은 영양지역 곳곳을 돌며 창의를 모색했다. 그러나 호응이 없자 1896년 청량산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한다. 그 뒤 경북 북부지역을 돌며 활동하던 김도현은 예안의 ‘선성의진’에 합세한다. 

선성의진의 중군장을 맡은 그는 태봉전투에 참여한다. 태봉전투는 서상렬이 이끄는 호좌의진과 안동 주변의 6개 의진 등 모두 7개 의병부대가 일본군 병참부대가 있던 상주 태봉에서 벌인 전투다. 

태봉전투에서 패한 김도현은 영양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부대를 만든 후 의병 60여 명과 함께 강릉의진에 합류한다. 연합 직후 김도현은 대공산성과 보현산성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 뒤 삼척으로 이동한 연합의병은 5월 31일 관군과 큰 전투를 치루지만 손실을 입은 김도현은 1896년 영양으로 회군한다. 

▲고종이 김도현에 내린 밀지.(경상북도 제공)

김도현은 검각산성(劍角山城)에 의병을 모아 본진을 주둔시켰다. 검각산성은 1894년 무렵 사재를 털어, 자신의 집 뒷산 검각산에 쌓은 성이다. 이곳을 근거지로 김도현은 1896년 10월 15일까지 영양·안동·청송·영덕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는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최장기간에 걸친 항전이었다. 

김도현은 1905년 을사늑약 소식에 서울로 올라가 상소를 올리는 한편 각국 공관에 포고문을 보내 역적의 처단과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한다. 하지만 상소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06년 1월 21일 5읍도집강 때 활동하던 포수들을 규합해 거의를 도모한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체포돼 대구감옥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06년 가을 광무황제의 밀칙을 받은 김도현은 각 지역에 격문을 발송하고 다시 거병을 준비한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9년부터는 학교를 설립해 교육활동에 힘쓰기도 했다. 

의병항쟁과 교육활동으로 항일투쟁을 펼치던 김도현은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자진을 결심한다. 그가 순국자정을 결정한 데는 스승 이만도의 영향이 컸다. 

스승의 단식투쟁을 지켜보던 김도현은 함께 자결을 결심했으나, 스승 이만도는 이를 만류한다. 당시 김도현의 부친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김도현은 뜻을 잠시 미루다 1914년 부친이 운명하자 자정순국의 의지를 결행한다. 

그가 선택한 길은 단식이나 음독자살이 아닌 ‘도해(蹈海)순국’이었다. 김도현은 ‘나라가 망하였으니, 전국시대 제나라 노중련처럼 바다를 밟고 들어가겠다’는 뜻을 담았다. 

▲도해단(경상북도 제공)


김도현은 1914년 11월 7일 동짓날, 집을 떠나 영해의 대진으로 향한다. 그는 도해(蹈海)하기 직전 국권회복을 위해 달려왔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나라 잃은 회한을 풀어놓았다. 다음은 김도연의 절명시(絶命詩)다. 

조선왕조 오백 년 마지막에 태어나
붉은 피 온 간장에 엉키었구나. 
중년의 의병 투쟁 19년에 
모발만 늙어 서리 끼었는데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어버이 여의니 마음도 아프구나.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이레 날이 마침 동지로구나. 
홀로 외롭게 서니 옛 산만 푸르고 
아무리 헤아려도 방책이 없네. 
희고 흰 저 천길 물속이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 하여라. 

시를 남긴 김도현은 관어대 앞 바다 속으로 걸어 들어가, 생을 마감한다. 그가 선택한 도해순국(蹈海殉國)은 일제에 의해 조선이 멸망하고 고국산천을 모두 빼앗긴 상황에서 자신의 육신을 남의 땅에 맡길 수 없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러한 순국 투쟁은 밖으로는 일제 강점의 부당성에 대한 전면적 저항이었고, 안으로는 민족의 자존심을 지킴과 동시에 민족적 각성을 불러일으켜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영양군에서는 일찍부터 그를 기리는 일이 추진됐다. 1954년 3의열사기념사업회에서 영양의 3의사를 기리는 삼의각(三義閣)을 건립한다. 3의사란 김도현과 엄순봉, 그리고 남자현을 이른다.

이어 1977년 이들의 행적을 기록하기 위해 삼의사비(三義士碑)를 세웠다. 이 때 김도현지사기적비도 세워졌다. 이 비는 지금 영양호국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홍석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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