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신라 천년의 향기를 담은 경주나 선비문화의 수도 안동, 가야 문화의 본고장 고령 등 그야말로 발길 닿는 그곳이 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이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이지만 지나온 시간의 절반을 차지했을 선조들의 어머니, 혹은 딸들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경상북도가 진행하는 역사 속 경북여성의 삶과 자취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만나는 경북 여행(女行)길’ 탐방은 매우 시의적절한 시도라는 평가다. ‘여행(女行)을 찾아가는 여행(旅行)’이라는 주제로 경북 여성들의 삶의 자취를 다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부. 혹한을 견딘 매화의 향기
1)나라는 품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2)하와이 독립운동가 이희경
2부.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다
1)경북 여기자 1호이자 종군 작가 장덕조
2)대구여자경찰서 초대 서장 정복향
3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1) 조선의 마지막 보모에서 육영사업의 시초 최솔성당
2)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금녀의 유리벽 깬 여자경찰서장’
대구여자경찰서 초대서장이었던 정복향(1910~1998.8.12)은 여성의 삶도 얼마나 다이나믹할 수 있는 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안주하지 않고, 새 길을 향해 나아가길 두려워 하지 않던 교육인이자 경찰 겸 정치인인 정복향에 대해 알아본다.
◆교사생활 중 기혼자로 경찰 응모
1910년 태어난 정복향은 대구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대구여고보)와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전신)를 졸업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1947년 우연히 경찰 간부모집 공고를 보게 된다.
정복향은 당시만 해도‘금녀의 영역’인 경찰에 여성이 진출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후에 정복향은 “공고를 보는 순간 이름을 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한민국에서 여자가 경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46년이고,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여자경찰서가 창설된 것은 1947년이었다. 미군정하에서의 경무국장이었던 조병옥과 경무부 고문이었던 미국의 프름 대령은 불우청소년과 부녀자보호단속을 위해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 뜻을 함께 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여경간부 16명과 여경 1기생 64명을 선발해 수도관구에 배치하고 중앙에 여성경찰과를 신설했고, 각 도의 일선경찰서에 배치해 근무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1947년 3월 중앙 여자경찰서 설립에 이어 대구, 인천, 부산지역에도 여자경찰서가 설치돼 독립적인 조직으로 활동했다.
당시 대구여자경찰서는 대구시 중구 대안동, 대구경찰서 동편에 있었는데 외근계, 조사계, 유치장 관리계, 총무계 등으로 구성되었다. 기혼자도 가능하다는 것에 정복향은 망설임없이 원서를 냈고, 필기시험에 수석 합격했다.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불합격하는 우여곡절 끝에 합격통보를 받은 정복향은 경찰전문교육을 거쳐 대구여자경찰서 초대서장으로 취임했다.
◆3년간의 경찰 생활 후 우익활동도
대구여자경찰서는 대구와 경북 일대의 여성 및 아동과 관련된 사건을 담당했다. 특히 공창제도 폐지와 함께 크게 사회문제화 된 사창을 단속하고, 학생문제 상담에 주력했다. 아울러 좌익계 여성 사찰에도 나섰다.
정복향은 1949년 2월까지 약 3년간 수행한다. 대구여자경찰서는 정복향을 뒤이어 5대 여성서장까지 이어지다 1957년 10년간의 짧은 역사를 뒤로하고 폐지된다. 경찰복을 벗은 정복향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9월에 발족된 대한여자청년단 경북도단장을 맡았다.
대한여자청년단은 6·25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여자청년들의 훈련이나 계몽활동의 불가피성을 깨달은 정부가 단시일내에 조직한 단체였다. 모윤숙이 단장을, 맡고 김철안이 부단장을 맡았고, 정복향은 경북도 단장으로 임명됐다.
◆대구서 첫 여성도의원 당선
초대 여자경찰서장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던 정복향은 또다시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가게 된다. 1956년 열린 경북도의회 의원 선거에 홍일점 후보로 뛰어든 것이다. 1956년 7월 23일자 한 신문에는 ‘대구시에 입후보한 민주당 정복향 여사(전 여경서장)가 홍일점으로 입후보해 이채를 띄고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정복향은 지역 유력인사를 물리치고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2대 도의원으로 당선된다. 4년간의 의정활동을 거친 정복향은 1960년 11월에 다시 민주당 후보로 도의원 출사표를 던졌지만 낙선하고 만다. 그 후 정복향은 대구시·경상북도 교육위원, 경북여성회관 관장, 경북여성단체협의회(현 경북도여성단체협의회 전신)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대구 여성의 힘을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거친 정복향은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정회(유신정우회, 현재의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한다. 경북여성단체협의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데다 초대 경찰서장, 도의원 당선 등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복향은 1973년~1976년까지 4년간 의정활동을 폈는데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하숙을 치며 가정을 돌보는 데도 허술하지 않았다.
정복향은 “경찰, 협회장, 정치인 등 1인 4역을 감당했고, 그 어려움을 남들은 전혀 눈치 채지않게 했다”면서 “매사 정말 열심히 일해야겠지만, 그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기도 했다. 정복향은 9대 국회 의정활동을 끝으로 가정으로 돌아가 자녀교육 뒷바라지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정복향은 1998년 8월 12일 오전 9시 30분 대구 서구 내당동 자택에서 향년 89세로 별세했다./홍석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