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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종군기자로 명성

<경북 여성로드를 만들다> 3.장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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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홍석천기자 |  2014.11.05 17:43:26

경북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신라 천년의 향기를 담은 경주나 선비문화의 수도 안동, 가야 문화의 본고장 고령 등 그야말로 발길 닿는 그곳이 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이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이지만 지나온 시간의 절반을 차지했을 선조들의 어머니, 혹은 딸들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경상북도가 진행하는 역사 속 경북여성의 삶과 자취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만나는 경북 여행(女行)길’ 탐방은 매우 시의적절한 시도라는 평가다. ‘여행(女行)을 찾아가는 여행(旅行)’이라는 주제로 경북 여성들의 삶의 자취를 다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부. 혹한을 견딘 매화의 향기 
1)나라는 품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2)하와이 독립운동가 이희경 

2부.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다 
1)경북 여기자 1호이자 종군 작가 장덕조 
2)대구여자경찰서 초대 서장 정복향 

3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1) 조선의 마지막 보모에서 육영사업의 시초 최솔성당 
2)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장덕조 여사(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지금으로부터 10년도 전인 2003년 2월의 어느날. 지역의 신문들은 다음과 같은 부음 기사를 냈다. 

‘원로작가 장덕조씨 별세 
원로작가 장덕조(張德祚)씨가 17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9세. 장씨는 경북 경산 출신으로 서울 배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왔다. 1930년 문단에데뷔한 이래 ‘함성’ ‘창백한 안개’ 등 120여편의 단편소설과 「벽오동 심은 뜻은」「민비」「낙화암」「이조의 여인들」 등 90여편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조선일보 기자, 영남일보 문화부장과 논설위원 등을 지냈다. 한국전쟁 종군기자로도 활약했으며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이렇듯 지역 언론에서조차 장덕조의 직업은 작가였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업적이나 영향력이 크다 하더라도 장덕조의 가치가 드러나는 분야는 바로 언론분야다. 

바로 ‘경북출신 여기자 1호’ 인데다 휴전 협정을 취재한 ‘유일한’ 종군 여기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250여 편이 넘는 소설과 희곡을 남기면서 장편 역사소설 분야를 개척한 것도 엄청난 업적이긴 하지만. 

◆일제에 반항한 비행소녀(?) 
장덕조는 1914년 경북 경산군 자인면 북사동 속칭 순월마을에서 태어났다. 장덕조는‘소녀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타고나 일찍 한문을 깨쳤고, 역사 지식도 풍부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뛰어난 역사의식은 학창생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920년 대구로 이사온 장덕조는 경북여고 전신인 대구공립여자보통학교를 다녔으나 졸업은 하지는 못했다. 

광주학생의거 격려문 사건과 교내 일본 교사 배척동맹휴학을 주도한 두 번의 반일 활동 때문이었다. 

◆개벽사 기자로 언론계 입문 

이후 상경한 장덕조는 배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이화여자전문 영문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듬해 이화여전을 중퇴하고, 월간 종합 잡지 개벽사 여기자로 입사했다. 개벽사에 둥지를 튼 장덕조는 선배 이태준의 추천으로 1932년 ‘제일선’에 단편 ‘저회(低徊)’를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한다. 

일제 시기 장덕조는 기자 활동보다는 작가로서의 동인지 활동에도 적극성을 보인다. ‘월간 야담’에 야담 등을 기고했으며, 문예·교양·취미잡지 ‘청색지’나 해방 직후 ‘백민’등 동인지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또한 이념대립이 치열했던 해방이후에는 우익의 가치를 지키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좌익진영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프로예술연맹에 대항해 전조선문필가협회가 조직되자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 서울 중앙 문단에서 실력을 발휘하던 장덕조는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기자적 삶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대구에 오자마자 장덕조는 영남일보 문화부장에 선임됐다 1951년 대구매일신문 문화부장과 논설위원을 하게 된다. 이 시기 장덕조는 대구매일신문에 ‘여인상’을, 대구일보에 ‘논개’를 발표했고, 칼럼 ‘노노자’를 연재했다.

1951년 육군종군작가단에 합류한 장덕조는 육군 부대를 따라 종군해 전선 시찰에서 얻은 경험을 소재로 반공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품들을 발표한다. 그 와중에도 경북 출신 여기자 1호는 종군기자로서 역량을 발휘하여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9분, UN군과 북한군이 판문점에서 만나 3년여의 전쟁 상태를 중단하는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현장을 보도한다. 

1951년 7월 8일 이후 2년여를 끌어온 회담이었지만, 이날 서명은 시작한 지 9분 만에 끝났다. 당시 종군 기자는 90명 정도 됐지만 조인식을 취재한 종군기자는 50여 명이었다. 여기자로는 장덕조가 유일했다고 전해진다. 

▲1963년 회식에서. 첫줄 왼쪽부터 전숙희, 장덕조, 박종화, 조애실.둘째줄 왼쪽부터 오윤숙, 손소희, 최정희, 박화성(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휴전이 되면서 장덕조는 주로 역사소설과 여성소설을 쓰면서 작가생활에 열중한다. 평생을 쉼없이 살았던 장덕조는 언제나 자기완성을 향해 구도자처럼 꾸준히 걸어갔다. 장덕조의 대표작으로는 1953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광풍’이 있다. 김시습을 주인공으로 횡포한 세조 치하의 역사적인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문종의 승하와 더불어 시작되는 이 소설은 어린 단종의 쓰라린 생애와 상왕 복위를 꾀하다가 능지처참을 당하는 성삼문을 중심으로 한 사육신의 모습 등, 역사적 사실을 그리는 중에 오직 의를 위하여 초야에 묻혀 기인으로 살아가는 김시습의 행적을 충실히 그리고 있다. 

특히 작가는 사욕과 권세를 위하여 사악한 세조의 주구가 된 신숙주와 대비해 대의를 위해 천하를 방랑하면서 은거생활을 하는 김시습의 대인다운 풍모를 묘사했다. 
사색과 탐구를 바탕으로 지칠줄 모르고 써내려간 장덕조는 경북이 낳은 첫 여기자였다./홍석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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