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은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신라 천년의 향기를 담은 경주나 선비문화의 수도 안동, 가야 문화의 본고장 고령 등 그야말로 발길 닿는 그곳이 역사박물관이다. 그러나 이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경북이지만 지나온 시간의 절반을 차지했을 선조들의 어머니, 혹은 딸들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경상북도가 진행하는 역사 속 경북여성의 삶과 자취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로 만나는 경북 여행(女行)길’ 탐방은 매우 시의적절한 시도라는 평가다. ‘여행(女行)을 찾아가는 여행(旅行)’이라는 주제로 경북 여성들의 삶의 자취를 다시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글싣는 순서
1부. 혹한을 견딘 매화의 향기
1)나라는 품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2)하와이 독립운동가 이희경
2부. 여성의 유리천장을 깨다
1)경북 여기자 1호이자 종군 작가 장덕조
2)대구여자경찰서 초대 서장 정복향
3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1) 조선의 마지막 보모에서 육영사업의 시조가 된 최솔성당
2) 최초의 민간 여성 비행사 박경원
2013년은 한국인의 하와이 이민 110주년이 되는 해다. 첫 하와이 이주민을 실은 배가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것이 1903년 1월 3일. 그로부터 1905년까지 7200여 명의 한인이 노동이민을 떠났다. 그중 경북 영양출신 권도인이 있었고, 그의 사진만 보고 1912년 19세의 이희경은 공부할 수 있다는 꿈을 안고 하와이로 갔다.
이들은 역경을 극복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성실성 하나로 가구사업에 성공을 거뒀다. 또 민족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이희경은 미주지역을 대표하는 여성독립운동가로 공적을 남기게 된다.
◆사진신부 이희경, 하와이로 향하다
1912년 10월 한 소녀는 하와이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는다. 중학교를 갓 졸업한 19세의 이희경이다. 사진 한 장에 기대 공부할 수 있다는 꿈을 갖고 결혼을 작정하고, ‘태평양의 낙원’하와이로 향하는 걸음이었다. 남편 될 사람은 경북 영양출신의 25세 권도인이었다. 권도인은 1888년 9월 27일 영양군 석보면 북계동(현 소계동)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기록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만16세 되던 1905년이다. 그해 권도인은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고향을 떠나 인천으로 가서, 시베리아호를 타고 1905년 2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당시 이민자 대다수가 20~30대였음을 감안한다면 매우 어린 나이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권도인이 처음 실려 간 곳은 카우아이섬의 콜로아였다. 그는 4년 넘게 그곳 사탕수수밭에서 일했다. 하와이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먼저 드러낸 것은 이희경이 아닌 남편 권도인이었다. 1909년 안중근의 의거 소식에 미국에서는 의연금 모집이 벌어졌고, 그 성금으로 ‘대동위인안중근전’을 편찬했다.
바로 그 부록에 권도인이 1원(현재 20달러에 해당)의 성금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 1910년 그는 대한인국민회 콜로아지방회의 회장에 취임한다. 이민 온지 5년 만이자, 갓 약관을 넘은 나이였다.
권도인이 호놀룰루로 가 점원으로 일하던 1910년 11월, 하와이 한인사회가 술렁인다. 하와이에 첫 사진 신부들이 도착한 것이다. ‘사진 신부’란 사진만 보고 혼인이 결정된 신부를 말한다. 이에 권도인도 자신의 사진을 국내로 보낸다. 적극적인 성격의 이희경이 소극적인 언니를 제쳐두고 결혼하겠다고 하와이로 향하면서 1912년 10월, 25세의 권도인과 19세의 이희경은 이국 땅에서 부부의 연을 맺는다.
이희경은 대구 신명여학교 1회 졸업생이다. 신명여자고등학교 동창회 명부에는 1912년 5월 31일에 졸업한 1회생 3명 가운데, 첫 번째로 이금례의 이름이 올라있는 것으로 보아 이희경의 본래 이름은 이금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하와이로 가서 이혜경이란 이름을 사용하다, 다시 이희경으로 바꾸었다.
▲신명여고 1회 졸업앨범. 왼쪽 첫번째가 이희경 여사다.(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가구사업가로 성공하다
이희경 부부는 역경을 딛고 가구사업가로 성장한다. 권도인이 처음 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결혼 후 가구장식 견습생으로 일하면서부터 였다. 그는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자신의 집 지하작업실에서 밤늦도록 실용가구 제작에 몰두한다. 그러던 중 새로운 가구를 만들어 1924년 미국 특허를 획득하는데 성공하면서 1928년 드디어 첫 가구점을 열기에 이른다. 결혼한 지 16년이 지난 무렵이다.
그러나 사업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첫 가구점을 열자마자 불어 닥친 세계경제공황은 이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부부는 다시 일어났고, 1936년에는 다시 가구점을 열었고 1937년에는 사업을 크게 확장하기도 했다.
◆사업과 함께 독립운동에도 탄력받아
사업가로 성장하는 한편 이들 부부는 함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남편 권도인의 독립운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국민회를 비롯한 단체의 간부를 맡아 한인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 지원이었다.
특히 1935년 이후 당시 언론매체에 권도인의 이름으로 기부된 것만 헤아려도 1만 달러 가깝다. 이를 미뤄 실제로 기부한 자금은 미주지역 전체를 대표할 만큼 많은 금액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권도인은 태평양전쟁이 나자 직접 민병대로 나서, 자신의 트럭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일을 맡았다. 더불어 두 아들을 입대시키기고 했다.
이는 그의 항일의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인 이희경 역시 대단히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호놀룰루에 도착한 뒤 활발한 교제력을 발휘해 영남부인회와 감리교회 및 대한부인구제회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1919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창립된 하와이 부인단체의 통일기관인 대한부인구제회회원으로 가입한다.
여기서 그는 독립운동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집·제공하고, 애국지사 가족들에게 구제금을 송금하는 등의 사업을 펼쳤다. 그 뒤 1928년 경상도 출신 부인들과 함께 대한부인구제회를 탈퇴하고, 영남부인회를 조직한다. 영남부인회는 곧이어 영남부인실업동맹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보다 나은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이희경의 노력은 1940년 12월 조직된‘하와이한인여성상의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영남부인실업동맹회의 활동이 하와이 한인 여성들의 경제활동에 큰 밑그림을 그린 중요한 단체였음을 의미한다. 이희경은 이 회의 회장을 역임하면서 15년간 한인부인사회의 발전과 독립운동 후원, 재미한인사회의 구제사업 활동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30년대 후반부터 독립금과 중경특파원 경비·의연금·부인구제회 의무금·혈성금·중국구제금·승전후원금·군사금 등 각종 의연금과 군자금을 지원했다.
이어 1940년대 초반에는 부인구제회 호놀룰루 지방회 대표로서 부인구제회 승전후원금 모집위원, 부인구제회 사료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한인국민회의 회원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총 수백 여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에 이른다.
나라에서는 고인의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희경은 권도인의 내조자에만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미주지역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로 우뚝한 공적을 남겼다./홍석천기자